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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별장과 홍순이

이강민 (병263기)

동행 주필, 태산승강기(주) 대표

1973년 겨울, 찬 바람이 몰아치는 서부 전선 최북단 섬 말도, 보통 지도에는 흔적이 없고 큰 지도를 펼치고 자세히 보아야 표시된 작은 섬. 여객선이 없어 앞의 섬 보름도에서 내려 뗏목을 타고서야 진입할 수 있는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DMZ 남측 한계선 안에 있는 홀로 된 작은 섬 '말도'

까까머리 열여덟 애송이가 멋모르고 해병대에 지원했고, 훈련을 마치고 팔리고 팔려 그곳까지 가게 됐습니다. 620명의 동기생들이 진해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사단, 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를 거쳐 각각의 근무지로 곤봉을 싸들고 ‘나가자 해병대’ 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나갈 때, 나 혼자 이런 무인도 같은 섬에 배치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부대원들이 열댓 명, 모두 내가 보았던 늠름한 대한민국 국군 같지 않은 시커먼 복장이었고, 마을은 민가가 서너 채 보이는데, 그야말로 만화 속에나 나오는 그런 작은 섬 말도였습니다.

해 질 녘 서해바다로 이글거리며 넘어가는 해는 정말 그림 잘 그리는 화가가 하얀 도화지에다 빨간 홍시를 확 터트려놓은 듯 멋지게 색칠을 하였고, 누구든 저녁노을 앞에서는 시인이 되었으며, 그래서 선배들은 그곳을 ‘황혼의 별장’이라는 기막힌 이름을 지어 붙였나 봅니다.

 

ㅡ‘황혼의 별장’이라는 기막힌 이름

 

“아! 저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하는 박재삼 시인의 애끓는 탄식 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청마 유치환 시인도 이런 이글거리는 바다를 보고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나는 정말 어쩌란 말이냐” 하며 그 몸서리치는 아름다움에 붓을 들지 않았을까요?

내가 김포 청룡부대 여단본부에서 각 부대로 차출되기 전 조금 들은 얘기로는 말도라는 섬이 있는데, 거기는 북한 넘어가는 실미도 부대원들이 훈련하는 곳이라는 것과 거기는 해병대의 골통 특급 사고자들만 보내는 청송교도소보다 더 험한 살벌한 곳이라는 것 정도만 얼핏 들었지, 지금 내가 가는 곳이 그런 말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북한이 자기네 땅이라고 박박 우기는 함박도가 말도와 한 뼘 차이로 삐딱하게 보이는 해병대에서도 0.1%만 가볼 수 있다는 민간인 통제 지역.

나는 그곳에서 근무하며 월급날이 언제인 줄도 몰랐고, 아니 우리 같은 졸병은 월급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선임하사가 중대 다녀오면 건빵 한 봉지씩을 선심 쓰듯 주었는데 그날이 군인의 월급날인 것 같습니다.

군인의 생일이라는 국군의 날도 미역국은커녕 오래된 고추장이나 비벼 먹는, 보급품을 줄래야 줄 수도 없는 대한민국 최전선 고독한 섬 말도에서 군 생활을 보냈습니다.

가끔 모자에 별 몇 개 단 미국의 높은 분들이 헬기 타고 찾아와 기껏 주고 간다는 것이 운동 열심히 하라고 준 야구공과 야구방망이였는데, 어라! 선임들이 치라는 공은 안 치고 졸병들 엉덩이만 후려쳐 한동안 미군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컴컴한 지하 벙커에 들어서니 월남 전쟁에서 철수한 선임병들이 줄지어 앉아 참으로 신기하다며 마치 동물원 안 원숭이를 보듯이 나를 쳐다봅니다.

ㅡ “개나리 아리랑 남포, 감 잡았다. 나오라”

해병대 시절 이강민. 5대 1의 체력 시험을 뚫고 자원 입대했다. 벙커 밖에서는 앙칼진 여자 아나운서가 떠들어대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생생하게 들려오고, 벙커 안에서는 “개나리 아리랑 남포, 감 잡았다. 나오라” 하며 잡음 나는 무전 소리가 공포에 공포를 더해줍니다. 나는 너무 긴장하고 무서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수없이 외고 또 외웠습니다. 서울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강원도 최전방의 로켓이 평양으로 날아간다는 전자 컴퓨터 시대에 전기가 안 들어와 부대에서 호롱불을 켜고 지내는 군대가 있다니….

내가 그래도 5대 1의 체력 시험을 통과해 멋지다는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지만, 여긴 해병대가 아니라 당나라 군대다 하며 크나큰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군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신고합니다. 이병 이강민은…” 하는 신고식을 열댓 번 하고서야 최고 선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급은 분명 작대기 네 개 병장인데 턱에 털이 부스스하게 난, 호롱불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의 얼굴은 오십 먹은 사단 주임상사쯤으로 보이고, 반바지에 팔각모를 삐딱하게 쓰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껌을 씹는 그는 대한민국 군인이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의 빨치산 부대원이었습니다. 지리산의 빨치산 부대….

“누나 있어? 누나 있냐고, 이놈이 귀가 먹었나?”

“네, 있습니다.”

아!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슴이 사자에게 쫓기다 막다른 코너에 몰리면 사자가 물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쓰러져 신음하는 것처럼, 아니 영화를 보면 고문당하는 사람이 참다 참다 못 견디어 아무 말이나 마구 해대는 것처럼 나는 공포에 짓눌려 없는 누나를 있다고 토설하는 급박한 사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ㅡ나의 소원은 내일 죽어도 오늘 제대하는 것

“있습니다” 하는 한마디에 내무실 상황은 급반전했고, 빨치산은 나에게 “앉아, 힘들지? 자식, 겁먹기는” 하며 씩 웃었습니다.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성범죄자 그 모습이었습니다.

TV에서 가끔 보면 흉악한 범인이 현장 검증 갈 때 수갑 차고, 씩 웃는 모습처럼. 넌 오늘부터 내 옆에서 잔다. 빨치산은 늙은 마누라를 버리고 무슨 새 첩이나 들인 것처럼 날 보고 히쭉거렸고, 내 군 생활의 출발은 거기서부터 삐걱거리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모포를 덮었지만 잠이 올 리 있나요?

처음 온 신병이라 오늘은 보초도 안 세운다며 내 집처럼 편히 푹 자라고 하는데, 잠이 오느냐 말이에요. 벙커 밖에서는 북한 놈들의 대남방송이 윙윙거리지, 벙커 안에서는 통신병의 무전 소리가 소란스럽지….

ㅡ나보다 1개월 빠른 선임병이 겁에 겁을 더해줍니다.

“여긴 말이야, 예전부터 국방부하고 즉시 연결이 안 되는 지역이야. 적과 교전을 해도 우린 지원 못 받고 적이 침투하면 이 자리에서 모두 자폭하라고 부대 주위에 클레이모어를 벌집처럼 깔아놓았어. 그러니 함부로 밖에 나가 혼자 돌아다니지 마. 또한 저기 보이는 저곳이 북한 땅 연백이고, 저 철조망 보이는 곳이 북한 최정예 김신조가 훈련받은 124군 특수부대야. 서로 넘어와 목도 따 가는 특별한 곳이야.”

참으로 그때 나의 소원이 있다면 통일이 아니고, 내일 죽어도 오늘 제대하고 싶은 것이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해병대 탈영해서 동네 동사무소 가서 방위 생활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아! 내 친구 홍순이는 동네 동사무소에서 예쁜 미스들과 농담 나누며 커피를 홀짝거리며 아침저녁 어머님께서 싸 주시는 달걀 덮인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며 희희낙락 방위 생활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 해병대가 모양새 나서 입대한다고 동네에서 송별회 뻐근하게 하고 왔건만, 지금 여기 비참하게 떨며 자라는 잠도 못 자고 끙끙 앓고 있는 나의 모습은….

“누나 이름이 뭐야?”

빨치산이 한 단계 낮은 음으로 물었습니다. 무의식적인 공포 속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나의 말.

“네, 사촌 누나이고요. 이름은 이홍순입니다. 나이는 스무 살이고 대학생입니다. 예쁩니다….”

한번 거짓말에 2탄, 3탄의 거짓말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잘은 모르지만, 스무 살이고 대학생이고 예뻐야 빨치산이 흐뭇해할 것 같아 빨치산이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미리 내가 알아서 재차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ㅡ간덩이가 부어갑니다.

다음 날, 선임이 손수 끓인 보약보다 귀한 라면을 내 허기진 배에 꾸역꾸역 밀어 넣습니다. 사람이 죽으려면 뭔 꿈을 못 꾸겠는가? 뜨끈한 국물이 있으니 독한 소주가 한 잔 생각났습니다. 독한 소주 한 잔에 오늘 이 복잡하고 정리 안 되는 상황을 모조리 잊고 싶었습니다.

‘꿀꺽’ 하고 마지막 남은 국물을 비우는데 빨치산은 회장님이 식사 마치시는 것을 공손히 기다리는 비서처럼 “여기 담배” 하며 화랑 담배 장초에 불까지 붙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며칠 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감을 인식한 나는 휴가 가는 대원을 통해 한 통의 편지를 전보처럼 날랐습니다. 이강민 수필집, <아버지와 소> 중에서 다음 호에 계속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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