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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차관보의 운명적 만남외교관 로버트슨이 본 정치인 이승만

이승만(1875~1965) 대통령과 월터·로버트슨(1918~1970)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와의 첫 인연은 1953년 5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연석회의 때였다. 한국전쟁 종식을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2년이나 경과한 휴전회담이 이승만의 반대로 진전이 없고 포로송환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중심으로 군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감금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워 휴전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백선엽 장군이 지금 미국에 와 있다면서 협력 가능성을 암시했다.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인 캐벌 장군의 한국 현지 정세보고에 이어서 에들먼 육군본부 기획국장이 『에버레디』 작전의 세부사항을 설명하고 유엔군이 취할 조치들을 열거했다. 이승만을 구금하고 계엄을 선포한 후 유엔군 사령부 휘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로버트슨 차관보의 폭탄선언

에들먼 기획국장의 발언이 끝나자 국무부 극동담당 로버트슨 차관보가 발언에 나섰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날의 회의 목적이나 분위기로 볼 때 로버트슨의 발언은 폭탄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서 해군참모차장 던캔 제독의 『이승만 대통령을 정상 위치에 남아있게 하기 위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발언이 계속되면서 회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전시중에서도 국무부(문관)의 견해가 국방부(무관)의 정책을 재고하게 만든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며 신생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대통령에게 『에버레디』 작전과 상호방위조약체결이라는 두가지 방안을 건의하기로한 국무부와 합참 연석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5월 30일에는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전제로한 회의가 국무부장관실에서 소집되었다. 이날 회의는 한국정부가 휴전협정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계속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둔다면 미국과 필리핀 간의 방위조약수준의 안보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상신하기로 결정했다. 회의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백악관으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방위조약을 건의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즉석에서 이를 재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월 6일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향을 처음으로 공식화 하기에 이른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상황 반전

미국 대통령이 휴전과 함께 상호방위조약, 한국군 증강, 경제원조 그리고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담 등을 약속했지만 이 대통령은 포로문제와 중립국 감시단 입국불가를 주장해서 미국은 또다시 곤경에 처했다. 미국 국방부는 폐기했던 『에버레디』 작전으로 재차 비상대책을 수립했고 국무부는 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초청했다. 이 대통령은 전시중인 국가수반이 나라를 떠날 수가 없다며 덜레스 장관의 한국방문을 요청했다. 역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의회 회기 중이어서 덜레스 장관의 한국행이 불가함으로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월터·로버트슨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겠다고 제의했고 이 대통령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로버트슨 특사 파견을 합의한 다음날인 6월 18일 새벽 5시를 기해서 이 대통령은 2만 7천 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전세계를 놀라게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공포로 석방은 인도주의를 바탕에 깔고 미국과의 협상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고단수 결단이였다.

로버트슨 특사 서울서 협상 시작

이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로버트슨 특사는 23일 워싱턴을 떠나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해서 26일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과 첫 회담을 가졌다. 이 대통령을 퇴진시키려던 작전을 폐기시키는데 앞장선 사람과 그 같은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던 사람과의 첫 만남이었다. 1차 회담은 확대회담에 이어서 이승만-로버트슨의 단독회담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대면에서 이 박사의 여러 인물과 현사안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본 로버트슨 특사는 효과적인 협상을 위해서 단독회담을 제의했다. 그 후 12차에 걸친 회담이 단독으로 진행되었는데 로버트슨의 은퇴 후 각종 구술역사기록 자료를 보면 단독회담 후반까지도 그는 주로 듣기만 했다고 밝히고 있다. 6월 30일 5차 회담이 끝난 후 로버트슨 특사는 개인적인 관찰임을 전제로 국무부에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보냈다. ①이승만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이 있지만 자기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성격이다. ②그는 휴전협정안은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인 실패를 협상으로 만회하려는 계책으로 판단하고 있다. ③그는 미국과 동맹국들로부터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을 알고 있다. ④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와 협력하는 것이 그가 일생을 바쳐온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⑤그의 협력은 아직도 가능하지만 그를 도우면서 이끌어 주어야 한다. ⑥그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미국과 여타 나라들과는 비교 못할 정도로 공산주의와 싸울 결의와 의지를 지니도록 각성시켰다. 그 같은 정신과 용기는 보호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1945년부터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의 공사와 대리대사를 역임하면서 국공협상을 위해 마오쩌둥과도 만났고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본 증인답게 이승만의 정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 관찰로 읽히는 감동적인 대목이다.

국무부, 로버트슨 귀국 훈령

그러나 로버트슨 특사가 이 대통령의 통일 한국에 대한 열망과 공산주의에 대한 투철한 경각심을 이해하고 회담에 임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이 경과되도록 진전이 없자 국무부에서는 스미스 장관 대리의 명의로 7월 3일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해도 좋다는 훈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월터·로버트슨 특사는 귀국 대신 이승만 대통령과 마지막 담판을 시도했다. 『에버레디』 작전으로 제거될 수도 있었던 인물을 수호했던 당사자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연 7차에 걸친 회담에서 보고 느낀 이승만이라는 신생 독립국 지도자에 대한 연민과 신뢰의 감정에 바탕한 존경심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드디어 7월 11일에 열린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에서는 그동안의 쟁점이었던 정치회담, 포로문제, 상호방위조약 조속체결 등에 합의해서 12차에 걸친 밀고 당기는 긴박했던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8월 3일 덜레스 국무장관과 한국을 다시 찾아 경무대에서 한미방위조약 가조인식에 참석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탄생의 산파역이었던 로버트슨은 그 다음해인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에는 입원중이어서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1956년에는 부인과 함께 한국을 찾아 경제원조 증액을 협의했고 1957년에 또다시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우의를 다지고 한국군 증강도 논의했다. 휴전 직전 서울에 16일간 체류하면서 12차례 회담을 통해 처음으로 만나서 알게 된 후 4년만의 만남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월터·로버트슨은 서로 신뢰하던 덜레스 국무장관이 1959년 4월 건강상 이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나 한 달 후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한 달 뒤에 6년 동안 봉직했던 극동담당 차관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고향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역사학회에 소장하고 있던 4만여 점에 달하는 자료를 기증하고 미국 각지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며 여러 대학의 역사구술녹취 대담에도 응하면서 은퇴생활을 보내다가 1970년 영면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구술역사 프로젝트 대담에서 로버트슨은 2차 대전과 중국 내전 때 그리고 국무부 근무시절의 경험과 만났던 인물들에 대해 가감 없는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총 112페이지에 달하는 구술내용 중 한국관계는 13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분은 읽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로버트슨이 본 인간 이승만

『덜레스 장관은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그를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애국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사람입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도 아니며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 사람도 아닙니다. 왕조시대에는 개혁운동을 하다가 구금당했고 일본인들에 의해 추방당해 오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고문을 당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본인은 나이 많은 그분에게 매료당했습니다. 과격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을 때에는 완벽하고 매혹적인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서양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게 읽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정치적 대화가 아니면 매력적인 화술을 지닌 지성인입니다. 그는 낚시의 대가이기도 한데 고기를 잡는 것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며 휴식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같은 매혹적인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고하고 반항적이며 힘겨운 또 다른 성품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또한 실패후에도 포기할 줄 모르는 의연한 정신을 지닌 인간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1950년 기습공격을 가해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파괴와 혼란 그리고 파멸을 초래했으며 이 작은 한국에서 1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열정과 설득 그리고 불굴의 정신이 없었다면 한국국민들은 단결해서 침략군들을 퇴각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인 판단으로는 1940년에 영국에 처칠이 있었듯 1950년에 이승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40년 영국에서 처칠의 포기할줄 모르는 불화같은 감동적인 연설과 의연한 정신이 없었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이승만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 입니다. 』

로버트슨이 없었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에버레디』 작전에 의해서 구금되었을 것이고 오늘날 한미동맹으로 상징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도 무망했을 것이다.

신용석 로버트슨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감사의 글

1953년 당시 미국무성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Robertson)은 미국 특사로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1953.6.25.~7.11까지 12차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면서 마라톤 회의를 한 미 고위직 관료였다. 대한민국 건국 75주년을 맞이하여 로버트슨이 어떤 사람이었고 그가 한국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인가 등을 역사에 남기고 국민들이 잘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국내 저명인사들이 하나가 되어 로버트슨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그에 대한 자료 발굴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단체의 실무를 책임진 신용석(언론인, 정치인)초대 사무국장이 제공한 기고문을 보도한다. 국내 언론 중 취초의 보도 자료를 제공해 주신 신용석 사무국장께 감사 드린다.

신용석(愼鏞碩) 사무국장 / 언론인

신용석(愼鏞碩) 사무국장 / 언론인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군함 양무호의 초대함장 신순성의 맏 손자

인천 중/ 서울고/ 서울대신문대학원/ 파리제7대학교 석사/ 영,케임브리지대학원

1966년 조선일보 입사,프랑스특파원, 국제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이사장/ 2014인천아시안게임유치위원장

국민훈장동백장 1982/ 대한민국체육훈장맹호장 2014/ 프랑스문화훈장 1978/ 프랑스국가공로훈장 1980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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