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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이야기 - 해병대사령부 해체 비화김무일(해병학교 제35기. 현대·기아車그룹 임원역임)

'그날'이 오기까지

오후 두시 반쯤 됐을까? 정문 근무자로부터 유선 보고가 전달된다. '진달래 Two입니다.'. 총장이 퇴근한다는 음호다. One은 출근을 뜻한다. '알았다.'. 근데 연달아 전화벨이 울린다. '개나리 Two 입니다.', 참모차장 퇴근 보고다. '?'. 통상 총장이 퇴근하면 2, 30분쯤 지난 뒤에야 퇴근하던 차장이 즉시 뒤따라 퇴근하다니?

 

母軍이 옛 모습을 되찾는 날을 고대하며….

金 武 一.

'한라산 Two, 지리산 Two 입니다.'. '응 ?'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동시에 퇴근을 해?.순간 뭔가 긴박감이 머리를 스친다. 대방동 해군본부와 후암동 해병대사령부의 상황을 동시에 보고받던 통신체제였었다. 즉시 퇴근준비를 멈춘다.

'그날'은 1973년 7월 7일 토요일이었다. 입대한 지 어언 7년 7개월이 훌쩍 지난다. 타군보다 교육훈련이 빡빡하긴 하지만 복무기간이 짧고 'The Few, The Proud !.' 라는 슬로건에 이끌려 자원입대 했는데,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임관 후 김포반도 주저항선과 강화부대 말도소대장만 무사히 끝내고 나면 곧 사회로 복귀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파월명령이 떨어졌다. 주월청룡부대 직할 특공중대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아마도 두 차례 육군 특전사의 강하훈련과 수색대 설한지훈련 이수 경력 등이 참작되었던 모양이다. 통상 5, 6개월이면 소임을 끝낼 소대장역을 11개월 반을 치뤘다. 장덕, 故 지순하, 故 신종칠, 서찬국 대위등 4명의 중대장을 겪으며, 청룡 1대대부터 5대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작전때 마다 배속, 일반 소총소대장보다 몇 갑절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청룡부대 의장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얼마 후, 우측면 한강 하류 전류지 지역에서 공경렬 하사의 큰 사건이 벌어져, 피해 민간인과 민의 수습 차 부대교체 후 마무리 소임을 무사히 끝내면서 또다시 1년을 보냈다. 임관 5년이 훌쩍 지난다. 이제 나름대로의 국방의무를 보람되게 수행했다고 자부하면서 전역원을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 당시 심각했던 남북 간의 대치상황과 타군 위탁 교육 기간만큼 더 연장근무를 해야 한단다. 사회진출 적령기가 훌쩍 지나면서 심리적 갈등에 빠질 무렵, 김포여단 헌병대 변기구 소령의 천거로 보안과장에 보직됐다. 또 1년을 보낼 즈음, 차 상위 진급에 필수과정인 고등군사반 교육을 약 4개월간 수료 후, 해군 서울지구헌병대 보안과장으로 명령을 받는다. 이럭저럭 대위 4호봉으로 소령 진급을 눈앞에 두면서 30세 고비를 맞는다. 조국 분단의 현장 철책선 근무 중, 영토의 일대를 내 손으로 직접 지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포연이 자욱한 이국 전선에서 충성스러운 소대원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 사력을 다했다. 생과 사의 고빗길을 수없이 넘나들던 극한 상황 속에서 많은 종류의 인간군상을 보았다. 이 세상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 용감무쌍한 소대장도 있었지만, 정반대의 그렇지 못한 者도 더러 보면서 사람을 구별하는 식견도 넓힐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체험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커다란 교훈이 되는 값진 경험이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어차피 사회진출 시기가 물 건너 갔다면 차라리 남아의 浩然之氣(호연지기)를 맘껏 펼쳐보기로 굳게 마음먹고 군에 남기로 했다.

 

태풍 前夜의 적막.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그해 1973년은 어쩐지 전국이 뒤숭숭하고 음산한 기분으로, 곧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적막이 감돌던 때였다. 그 이유는 김신조 사태를 비롯하여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판문점 미군 도끼 만행사건과 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그리고 그해 3월 육군 제3사단 전방에서의 남, 북한 상호 포격 사건 등, 빈번한 북한의 불법 도발로 군부대는 물론, 시국이 온통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우리 국방력과 경제력은 북한과 비교하면 훨씬 뒤떨어진 데다가 미 '카터' 행정부에 의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면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분위기 속에 한해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소득을 살펴보면 거의 Zero 상태로 전 세계에서 최빈국에 해당하였을 때였다.

당시, 서울지구헌병대 본부는 관악구 대방동 해군본부에 위치했었다. 얼마 전 발생됐던 관할지역 내 유한양행 근처에서의 충격적인 '실미도 684군 부대원 자폭 사건'과 그 무렵 한국전쟁 정전 20주년을 전후해 발령됐던 비상근무가 근 2개월 만에 해제된 '그날'은 한해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7월의 첫 번째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오전 근무 종료를 알리는 영내 나팔소리가 온 부대를 울려 퍼지자 기다렸다는 듯, 회색빛 해군 퇴근 버스 수십 대가 마치 썰물처럼 줄지어 동문을 빠져나갔다. 그때 해군본부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었는데, 정문은 참모총·차장을 비롯한 수뇌부 출입과 주요 행사 때에만 사용됐었고, 일반 장병과 군무원들의 출퇴근은 주로 동문을 이용했으며, 서문은 해군병원과 장교 BOQ로 통하는 문으로 통용됐다. 모처럼의 비상근무가 끝나 청사 내, 모든 인원과 차량이 빠져나간 부대는 마치 적막강산처럼 썰렁했다. 해군본부 수뇌부만 퇴근하면 우리 헌병대 간부들도 퇴근하려 준비 중이었다.

오후 두시 반쯤 됐을까? 정문 근무자로부터 유선 보고가 전달된다. '진달래 Two입니다.'. 총장이 퇴근한다는 음호다. One은 출근을 뜻한다. '알았다.'. 근데 연달아 전화벨이 울린다. '개나리 Two 입니다.', 참모차장 퇴근 보고다. '?'. 통상 총장이 퇴근하면 2, 30분쯤 지난 뒤에야 퇴근하던 차장이 즉시 뒤따라 퇴근하다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책상 정리를 하는데 후암동 사령부정문근무자로부터 전화벨이 울린다. '한라산 Two, 지리산 Two 입니다.'. '응 ?'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동시에 퇴근을 해?.순간 뭔가 긴박감이 머리를 스친다. 대방동 해군본부와 후암동 해병대사령부의 상황을 동시에 보고받던 통신체제였었다. 즉시 퇴근준비를 멈춘다. 이날은 모처럼 신촌에 있는 Y대 대학원 보충수업이 예정되었던 날이었다. 전령 오기석 상병에게는 해군본부 비서실을 연결하라 하고, 타자수 미스 노에게는 인근 공군본부 부관실을 대라고 했다. 나는 즉시 해병대사령부 김동렬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소령은 이병문 사령관의 수석부관이다. 결과는 모두 동일한 답변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

심각한 표정으로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밝은 표정이다. '무슨 일일까?. 대북상황이나 적정 사항은 아닌 모양이지?.'. 안도감을 가지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 후에 총장실과 회의실을 바삐 드나들던 백 중령이 구석 자리로 필자를 부른다. '10월 10일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병대 전병력이 해군 예하부대로 통·폐합 된다는 대통령의 긴급훈령이랍니다.'. "아니! 이럴 수가?",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이다. 청천병력의 순간이다.

 

해군참모총장 비서실장 백종원 중령과 김동렬 소령의 답변은 일치했다. '국방부장관의 긴급호출과 별명이 있을 때까지 각급 주요참모는 대기하라.'라는 지시란다. '혹시?' 즉시 육군본부 전속부관 정 대령에게도 확인했는데, 모두 같은 답변이다. 단지 공군본부는 참모총장만 호출했단다. '아! 무슨 일이 터졌구나!' 하필이면 2개월간의 비상근무가 해제되던 주말의 오후에 이렇듯 긴급상황이 벌어지다니? 헌병대장이 위치한 회현동 시내파견대로 전화를 해 헌병대장 윤웅섭 중령을 찾으니, 무슨 기미를 알았던지 대방동 해군본부로 급히 출발했다는 보고다. 즉시 무선망을 열어 헌병대장과 통신을 시도한다. '어디쯤입니까?', '한강 중지도를 지나고있는 데 무슨 일인가?', '무선(無線)이라 자세한 보고를 못 드리니 지금 즉시 mnd로 가셔서 유선통화 바람 오버!', mnd는 국방부의 略字다. '알았다. 그리로 가겠음'. 초조한 시간이 흐른다. 불안한 마음으로 각 군 상황실과 해병여단의 전방관측소에 확인해보니 다행히 특기할 만한 적정(敵偵)은 포착되질 않았지만, 역시 불길한 마음은 가라앉질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이 흐른다. 첩보와 정보의 차이점이 실감 나기도 했다. 각 군 비서실과 부관실에서는 해당 본부 사항만 인지하여 별다른 특이점이 감지되지 않았겠지만, 수집된 첩보가 정보로 전환된 후의 결과는 예상외의 중요한 종합정보로 정리될 수도 있다고 배웠다. 수도경비사의 작전 과장 신윤희 소령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외곽경비부대 순찰 중이라 했다. 사령부 보안대장 박선호 대령(중정 의전과장 역임)에게 어간의 사항을 간략하게 전달하니,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며 즉시 mnd 로 달려가 진행 사항을 알려주기로 협조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일단 관할 지역인 해군본부와 사령부의 헌병대 당직 근무자는 물론 주요보직자에게 별명이 있을 때까지 정위치 근무를 지시해 놓고,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두어 시간이 흘러온 후 4시로 접어든다. 이윽고 mnd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헌병 대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방금 회의가 끝나 각자 소속본부로 출발했음. 본인은 사령부로 가서 동향을 살펴볼 테니, 보안과장은 즉시 참모총장실로 가 동향을 파악, 보고해 주기 바람.'. 매우 다급한 음성이다. 해군본부 비서실로 들어서니 역시 긴장된 분위기였지만, 각 군 수뇌부가 회동했던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백 중령에게 넌지시 물어도 통 감이 잡히질 않는단다.

이윽고 김규섭 대장과 참모차장 차수갑 중장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심각한 표정으로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밝은 표정이다. '무슨 일일까?. 대북상황이나 적정 사항은 아닌 모양이지?.'. 안도감을 가지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 후에 총장실과 회의실을 바삐 드나들던 백 중령이 구석 자리로 필자를 부른다. '10월 10일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병대 전병력이 해군 예하부대로 통·폐합 된다는 대통령의 긴급훈령이랍니다.'. "아니! 이럴 수가?",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이다. 청천병력의 순간이다. '68년도 구정 공세날, 지순하 중대장이 필자의 코앞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고 피를 뿜어대는 동시에, 필자의 철모가 적탄에 뚫리던 충격 때도 이렇진 않았다. 문득 벽시계를 본다. 1973년 7월 7일 토요일, 오후 5시로 넘어간다. 즉시, 무선통신을 통해 현병대장을 호출하니 사령관실에 대기 중이란다. 그리고 아직 기미를 모르지만, 그쪽은 대방동과 달리 마치 초상집처럼 침통한 분위기란다. 자초지종을 요약해서 전달할 때 헌병대장은 기가막힌 듯 한동안 대답이 없다. 못 믿겠다는듯 '재송바람! 재송바람!!'일뿐…. 통신기 너머로 경악스런 표정이 떠오른다. 잠시 후에 보안대장 박선호 대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필자를 찾는다. 동일한 내용을 확인하는 전화다. 이제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24년 전통의 해병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군기(軍旗)를 내려야 한다니?

 

군기(軍旗)는 내려지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휴일도 출근해 텅 빈 사무실을 당직 근무자와 지켰다. 월요일 출근하니, 부대 안. 팎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장교는 장교들대로,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침통한 소식뿐이다.

 

'그날' 그 주말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아마도 군 내부의 반발을 염려해 국방장관의 긴급 소집을 한적한 토요일 일과 후로 비상소집을 했나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휴일도 출근해 텅 빈 사무실을 당직 근무자와 지켰다. 월요일 출근하니, 부대 안. 팎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장교는 장교들대로,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침통한 소식뿐이다. 김포여단의 반발을 염려해 인접 지역 내의 육군공수특전단이 비상대기 중이라는 둥, 상륙사단과 예하 파견부대 주변을 감시하고자 보안대 요원들이 주야로 층층이 깔렸다는 둥, 각 부대 열혈 장, 사병들이 할복을 준비한다는 둥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뭐 하나 신통한 대안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혀지면서 하루하루 날짜가 지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해군본부 해군 장·사병들이 해군부대에 파견근무 중인 해병대 근무자들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보일 정도다. 예컨데 단속 헌병에 대한 불손한 태도라든가, 전에 없던 본부사령의 일방적인 지시사항과 불시호출 등, 심지어 헌병감실 주변의 해병대 차량을 단속한답시고, 해군 본부사령 이O래 대령을 위시한 고급장교들이 차량 타이어를 발길로 걷어차는 등, 갑자기 설쳐대는 작태는 가관일 정도로 돌변했다. (필자는 이때 전역을 결심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7월이 지나 8월로 접어드니, 본격적인 통·폐합절차에 따라 후암동의 병력과 장비가 분산되면서, 생소한 보직 명칭인 '제2참모차장', 상륙병과 라던가, 혹은 새로 급조된 '해병참모부' 등, 각급 참모부가 재편성되는 듯 부대 이동이 빈번해지고, 집기, 비품까지 해군본부로 집결한다. 아울러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계급별 전역희망자의 전역심사가 동시에 이뤄지다 보니, 軍에 남을 잔류자와 전역희망자 사이에 심리적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필자 역시도 뜻을 함께하던 몇몇 동기생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눠, 전도봉과 이영세, 김도삼 등 군에서 유망한 동기들은 군에 남기로 하고, 해군의 실태를 이미 겪어본 필자는 어렵사리 로비해 가며 이쯤에서 정들었던 군복을 벗기로 한다. 정확히 7년 7개월 7일 ('66.3.4.-'73.10.10.)만이다. 전역은 9월 10일, 20일, 30일 세 차례로 나뉘어 결정되어 필자의 전역일은 모군의 제반 행사 일정에 따라 9월 30일로 결정되었으나,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와 10월 10일 '해병대사령부 해체식 행사'의 경비책임을 참작해 10월 10일로 미뤄졌다. 이날은 사령관 및 참모부장급 극소수 장성급 장교들의 전역으로 축소되었다. 이유는 군봉급 지급 날이 매달 10일이기에 가급적 그 전달에 대부분 전역시켜야 예산이 그만큼 절감된다는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전역자 중에 당일 행사의 필수요원으로 선정된 유일한 위관장교는 사령부 의장대장 이상우 대위와 필자뿐이었다. 예편 규모는 장교 362명, 부사관 358명, 군무원 416명, 도합 1136명이 정들었던 해병대를 떠났다. 어찌 그뿐이랴? 파월 귀국병력 3천여 명을 포함, 일시에 4천2백여 명이 엄동설한에 뿔뿔이 흩어지던 날, 후암동 사령부 건물 내부 안팎과 유리창 등, 집기, 비품은 남김없이 작살이 낫다.

동기생 전도봉 사령관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사령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하던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헌병대 김무일 대위와 수시로 만나 앞길을 상의하며 현실을 통탄했다. 그리고 '이대로 끝난단 말인가? 젊은 장교들은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울분 섞인 사령관의 원성을 곱씹으며, 사령부해체의 주모자를 색출해 처단하고, 행사장을 쑥대밭으로 휩쓸어 최소한의 해군 체면을 세우자는 의견까지도 나눠, 행사 당일 무장이 허용된 경비책임자 김무일 대위와 모종의 준비까지 도모했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인지한 양측부서 직속 상급자가 '만일 의도 했던 대로 귀관들의 거사가 이뤄진다면, 모군의 체면은 서는지 몰라도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 직속상급자는 물론, 퇴임하는 사령관까지도 그 책임이 미친다면 그 결과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라는 극구만류로 눈물을 머금고 모의를 중단했다"라고 그날의 울분을 서술했다. 드디어 해병대 운명의 날이 밝았다. 197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사령부의 통폐합현장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김종필 총리와 유재흥 국방장관의 말소리마저도 떨려 나온다. 각군 참모총장들의 얼굴도 처절한 표정이다. 이 행사를 지켜보던 예비역 노장들의 눈시울이 붉게 물든다. 어찌하여 백전백승의 상승부대가 창설 24년 만에 이토록 처참하게 막을 내려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자랑스럽던 해병대 깃발이 내려지는 순간, 과연 '그날'의 이 역사가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는지 숙제로 남긴 채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그 후 50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을 맞는다. 필자는 50년 전인 1973년 7월 7일 주말 오후에 이루어졌던 첫 정보를 전파하던 그 순간을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은 생애에 가장 쓸쓸하고 허무했던 가을로 기록될 것이다.

2023년 10월.

母軍이 옛 모습을 되찾는 날을 고대하며….

金 武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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