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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Douglas MacArthur 의 결심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구상

전략적 판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다면 전쟁을 단축하고 많은 사상자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의 신념

“지구상 어떤 전쟁도 대부분 병참 라인 때문에 괴멸당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정치적, 군사적, 심리적 효과를 얻을 것이다”

 

세계적 전략과 지략의 천재, 맥아더

그는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개교 101년 역사상 최우수성적인 4년간 평균 98.14점으로 졸업하여 1918년 38세에 준장, 39세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 45세에 최연소 육군소장, 50세에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57세에 원수계급으로 필리핀정부 군사고문을 지낸 세계적 명장이다. 1945년 도쿄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 재임 중 6·전쟁기인 1950년 7월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특별한 우정

신생 대한민국이 북한의 남침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그와 같은 걸출한 세계적 명장을 만났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한 기회였고 대한민국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큰 은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맥아더는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듯 특별한 1급 정신력을 가진 지도자로 남다른 우애를 갖고 있다. 맥아더가 도쿄 연합군 사령관 5년 동안 해외에 간 것은 1946년 필리핀 독립기념일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선포식 단 두 차례였고 맥아더가 자신의 전용기 바탄호를 빌려준 적이 두 차례였는데 모두 이승만에게 제공되었다. 맥아더는 5년 형인 이승만이 세계적 명문대인 죠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3곳에서 5년 만에 학·석·박사학위를 취득한 동양의 독립운동가에게 매료되어 특별한 우정과 존경심을 서로 교감하고 있는 사이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구상까지 발걸음

맥아더는 6월 25일 일본 도쿄에 있는 사령관 숙소에서 미 극동군사령부 당직 장교로부터 긴급전화로 북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는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가 발표한 해군과 공군력으로는 북한의 남침 저지를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6월 29일 맥아더는 도쿄사령부에서 수원으로 날아와 호위 병력도 없이 지프로 한강변 노량진 언덕에 올라 서울의 불타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면서 지상군 투입 외에는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리며 수원으로 돌아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각하 제가 나의 고향을 지키듯 대한민국을 지켜 드리겠습니다”라며 한국정부에 용기를 주었다.

맥아더는 즉시 워싱턴에 긴급전문을 통해 지상군파견을 요청하며 “지체없는 명확한 결정이 시급하다”라고 타전했다. 트루먼은 이 보고를 받고 즉시 지상군 1개 연대와 2개 사단 증파를 그날 9~10 사이에 국무, 국방 및 각 군 장관회의를 통해 신속히 승인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육군병력 사용에 대한 전권을 주어 개전 5일 만에 미 지상군 파견이 이뤄졌다. 그 후 9월 15일 D-day까지 2개월여 기간 동안 맥아더는 전세 역전을 위해서는 인천상륙작전 외에는 돌파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으로 예측되고 천재적 전략가 맥아더의 구상이 적중했다.

브레들리, 콜린스, 셔먼의 반대

맥아더의 상륙작전 구상에 브레들리 미 합참의장은 “현대전에서 상륙작전은 낡은 전술이다”라고 반대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인천은 주 전선인 낙동강과 너무 멀어 상륙작전이 성공하더라도 낙동강 전선까지 이동이 너무 멀어 비현실적이다”라고 했으며, 셔먼제독(해군참모총장)은 “상륙작전 그 자체에는 반대치 않겠지만 조수간만의 차이와 수로 조건이 극히 위험하다”라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의 수로가 악조건이지만 그 악조건이 적으로 하여금 결정적 가습타격으로 당할 수 있는 중대 요소다”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다.

상륙작전의 걸림돌

- 조수간만의 차이가 세계 최고 33피트나 되는 인천 앞바다

조석 6시간 이내에 절정에 달해 56피트 조류를 유발하고 협소하고 굴곡이 심한 인천항 근해는 수백 년에 걸쳐 쌓인 거대한 진흙 둑이 있고 썰물 시에는 진흙 갯벌이 6,000야드나 해상으로 길게 뻗어있는 최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미 해병대도 창고나 건물 등 엄폐물을 이용해 많은 저항이 예상되는 대도시 중심부를 향한 상륙돌격을 감행한 예가 없었고 월미도와 인천시를 연결하는 좁은 도로 등 어느 것 하나 악조건 아닌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 국방장관은 인천상륙작전 감행을 승인하였다.

 1950년 9월15일을 D-day로 정한 이유

함정진입에 필요한 수심이 최하 29피트가 요구되는데 9월 중엔 9.15일 10월 중엔 10일, 11일, 11월 중엔 1~3일 밖에 없어 당시 정세 상황으로 볼 때 9월 외의 대안이 없었다.

- 한국해병대 참전

한국해병대가 상륙선봉군으로 영광을 맞은 이유는 6·25 이후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투 승리와 진동리 지구전투 대승으로 전원 1계급 특진으로 ‘귀신잡는 해병’ 칭호가 개전 2개월도 안되어 세계에 알려진 영향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한국에도 용맹스러운 해병대가 있다. 서로 배짱이 맞는 한국해병대를 참가시켜달라”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국군 최강 육군제17연대 투입예정을 변경하여 우리 해병대가 편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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