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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마당발 강경서(해병 163기) 단장, 그의 황혼을 엿보다.

황혼의 문턱에서

강경서(해병 163기) 단장

우리 해병대 역사 70여 년 동안 가장 보폭이 컸던 강경서 단장을 만났다. 왕년에 강경서를 만났던 다수의 전우가 그의 안부를 물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매우 궁금해하고 있다.

강경서 단장은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수도자 같은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선배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많은 분이 보고 싶어 합니다"고 일산에 있는 모 요양원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당연히 강 단장의 목소리가 들떠 있어야 하는데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여기는 정말 천국 같은 곳이에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평소 강경서 단장을 알았던 모든 전우에게 강 단장의 안부를 함께 전하며 그의 노후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제 그의 생은 정해진 열차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몇 차례 뇌경색과 불편한 거동 그리고 연로한 생이 왕년의 대단했던 입담의 강경서를 침묵게 하고 있음이 필자의 심장을 울컥하게 했다.

을지로에서 왕십리까지 소문난 ‘인기 짱’ 밴드부원

단국대 체대 2년생이었던 강경서는 해병대에 최초로 럭비부가 창설된다는 소문을 듣고 해병대 럭비부원이 되고 싶어 1965년 해병163기로 지원 입대했으나 럭비부 창설이 무산되는 바람에 평소 끼가 많았던 소질을 살려 군악 10기로 지원, 군악 교육을 받았다.

강경서 노병은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동네를 휘젓고 다녔던 ‘명랑한 꼴통’의 대명사로 불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중고등학교 6년간 성동중, 배명중, 성동고, 배명고, 장충고를 일 년에 한 번꼴로 들락이면서 어깨를 흔들고 다녔을 것이다. 그 보폭 범위가 왕십리에서 을지로까지였고 좀 논다고 하는 또래 사이에서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단다. 자신은 당시 명동 신상사파 막내 세대라고 하며 그쪽 인사들과 교분이 돈독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 그룹에 끼일 정도의 인성보다는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짱' 밴드부원이라는 것에 더 무게가 실린다. 중고등 때 국경일이면 시청 앞에서 종로 거리를 밴드부가 행진했는데 거기에 강경서를 본 여학생들의 환호가 제일 컸다고 했다. 이 말 역시 그의 끼를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 당시 밴드부원이면 담배 피우고 싸움 잘하고 잘 노는 학생들로 알아줬고 음악과 운동과 끼의 삼박자가 맞는 학생들의 그룹이었다.

 

해병대 군악대, 여단장 전령의 해병대 경력

그렇던 강경서는 해병대 군악대가 되어서 얼마나 맞았는지 동기생들에게 “오늘 저녁에 나는 도망간다”하는 말을 하곤 드디어 도망쳐 집으로 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홍사덕 형과 사촌 형이 찾아와서 "너 도망치려고 해병대 왔냐?" 하길래 "군악대에 있다간 맞아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변명했지만, 다시 끌려 들러가서 5여단 군악대로 보내더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속되자 여단장실 전령으로 명령이 나서 여단장님 한 분 외에는 무서울 게 없는 편안한 해병대가 되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당시 TBC 강영숙 아나운서가 집안 누님이었는데 'TBC 위문열차' 프로 위문 공연차 왔는데 여단장(박승도 장군 해사2기)실에서 "여기에 내 동생이 와 있는 부대 같다"라고 하니까 "누구냐?"

"강경서입니다" 하자 인사참모에게 "강경서를 찾아 보내라"하여 새까만 졸병이 기합이 바짝 든 채로 "이병 강경서 여단장님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필승!" 하니까 누님이 통곡하면서 "재가 우리 집의 희망인데 이상하게 됐네요" 하더란다. 그렇게 누님 덕분에 그날로 여단장실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강경서는 또 한 번 사건을 냈다. 밤중에 영외로 철조망 넘어가려고 어슬렁어슬렁하고 있을 때 여단장과 맞부딪쳤다. “누구야?” “옛, 강경서입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철조망 넘어 밖에 나가려고 그랬다고 할 수 없어 “전방 최고 지휘관이신 각하께서 안전하신지 저는 매일 12시까지 이렇게 한 바퀴 돌고 있는 겁니다!” 고 임기응변으로 말했더니 여단장이 감동하여 이튿날 참모 회의에서 어제저녁 얘기를 하면서 “참모들은 사병인 강경서만 못하다”라고 야단을 쳐 난리가 났단다. 참모들은 저놈의 농간인 줄 알면서 말을 못 한 채 그날 이후로 미운털이 박혔다고 한다. 이렇게 위트와 임기응변이 뛰어난 강경서는 나중에 사령부 경비 중대에서 제대했다.

 

‘해병대복지단’ ‘해병대 100인회’ 설립자 강단장

강경서 전우가 해병대 마당발로 알려진 것은 해병대 군장품 판매와 해병대 각종 단체장과 교분이 두터워지자 ‘해병대복지단’을 설립하여 그 이후부터 평생 ‘단장’ 칭호가 그를 따라다닌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해병대 강 단장하면 모두가 통하는 유머와 큰 소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강 단장이 큰일을 낸 것은 '자랑스러운 해병대 100인회'를 창립한 일이다. 서기 2000년 그가 미국에 갔을 때 ‘미 해병대를 사랑하는 어워드’가 제정되어 서로 존경하는 해병대들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우리 해병대는 누가 칭찬하거나 상 하나 안 주는 풍토임을 깨닫자 자랑스러운 해병대 100명을 선정해서 패를 만들어 주기 시작해 16년간 약 3,000명에게 ‘자랑스러운 해병대 100인회’ 공로패를 줬다. 그 이후 미국, 필리핀 등 세계 각국의 해병대들과 교분을 쌓아 교류하며 소통의 창구역할을 했다.

 

8명의 손자·녀를 둔 평범한 할아버지로 복귀한 강경서 해병

강 단장은 1990년대에 청계천의 ‘유람선’, 무교동의 ‘백만불’, 광교의 ‘은하수’, 천호동의 ‘은진’ 등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업소 다섯 곳을 운영하여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 후 자식들 교육을 위해 미국이민을 했다가 적응이 어려워 아들 셋과 아내를 남겨놓고 나 홀로 귀국했다. 장남은 미연방 경찰, 둘째는 미 육군 장교, 셋째는 테러부대 기동대장을 역임하는 등 모두 미국 사회에서 성공했고 여덟 손자·녀를 둔 할아버지다.

【발행인 신동설】

 

이제 갈 연습 중인데

재촉하면 뭐하나 이제 갈 연습 중인데

구름아 내 등 떠밀지 마라. 빨리 가라지도 마라.

그래! 헌 옷가지 펄럭이며 바람 따라 구름 가듯

세월아! 너는 왜 그다지도 무심 터냐. 매정 터냐.

내 마음속 떠오르는 노병의 입담 너스레.

그 강경서 다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요, 영원한 전우이니까…

한 번 해병은 천국까지 해병임을 영원히 기억하리.

어느 가을날 독백을 하며, 신동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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