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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전 국방부 장관(제4대 해병대사령관)의 생애보훈부 선정 8월의 전쟁영웅

■ 최연소·최장수 국방부장관 역임

김성은(金聖恩, 1924~2007) 장군은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오늘날의 해병대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김성은 장군은 83년의 삶을 살며 오로지 국가·해병대·하나님 이 세 가지만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했던 진정한 애국자이면서 참 군인이자 신앙심 깊은 장로(長老)로 일생을 마감한 장군이다. 김성은 장군의 군대생활은 처음부터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성은 장군은 육군·해군·해병대를 거친 대한민국 유일의 군인이다. 1946년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국무총리 역임) 장군의 권유에 의해 최초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나, 임관한 그날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국방장관 역임) 제독의 요청에 못 이겨 다시 해군으로 전군(轉軍)하였고, 1949년 해병대가 창설될 때 신현준(申鉉俊, 초대해병대사령관 역임) 장군의 간청에 의해 다시 해병대로 옮겼던 장군이다. 해군장교로서 촉망을 받던 시기에 그는 신현준 장군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해병대를 선택해 해병대를 오늘날 해병대로 가꾸고 발전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러한 김성은 장군의 군 경력은 대한민국 국군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다. 또한 김성은 장군은 6·25전쟁 3년 동안 단 한 번도 전선을 떠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사에서 길이 빛나는 진동리전투를 비롯하여 통영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 등 주요한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여 항상 이기는 해병대 정신을 불어넣어 준 지휘관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김성은 장군은 1963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5년이라는 최장수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한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김성은 장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대부(代父)인 신현준 장군과 함께 6·25전쟁을 통해 ‘귀신 잡는 해병’과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해병대 2대 정신’을 정립시키고 해병대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장군이다. 김성은 장군은 해병대 창설에 있어서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런 점에서 해병대 창설 초기 신현준 장군이 해병대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면, 김성은 장군은 해병대의 내실을 다지고 발전시켜 나가는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신현준 장군이 해병대 초석의 디딤돌을 놓았다면 김성은 장군은 어렵고 힘든 전투를 통해 해병혼의 전통을 수립하고 이를 지켜냈던 장군이었다. 이처럼 김성은 장군은 6·25전쟁 중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해병대 발전의 개척자 및 기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만큼 김성은 장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초기부터 6·25전쟁과 전후를 거치며 해병대 발전에 그 누구보다 그 공로가 컸던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김성은 장군은 오늘날 6·25전쟁의 영웅이자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호국의 인물로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서 존경을 받고 있다.

6.25 전쟁 당시의 김성은(사진 중앙) 장군의 모습

■ 대한민국 해병대 출범

대한민국 해병대의 출범은 역사의 필연적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8년 10월 19일 한반도의 남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南勞黨) 세력이 주도하여 일으킨 여순10·19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해군지휘관들이 진압과정에서 해병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전이 끝난 다음 해군수뇌부에 해병대 창설을 건의하여 이루어지게 됐다. 이때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해병대 창설을 건의했던 해군지휘관으로는 신현준 중령과 공정식(孔正植, 해병대사령관 역임) 대위 등이었다. 특히 여순사건 진압 차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신현준 중령은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할 수 없다”는 보고가 해병대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건의를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이승만 대통령이 승인하여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발족을 보게 됐다. 초대 해병대사령관에는 신현준 대령이 임명되었고, 신현준 사령관은 자신과 함께 해병대를 키워 나갈 참모장에 김성은 중령을 영입했다.

하지만 김성은 중령이 처음부터 해병대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해서 신현준 사령관은 애를 태웠다. 김성은을 얻지 못하고서는 해병대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었던 신현준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김성은의 마음을 돌리고자 노력했다. 이때 신현준 사령관은 삼국지에 서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얻었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생각해냈다. 신현준 사령관은 부인을 대동하고 김성은의 관사로 찾아가 해병대에 들어와 같이 일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신현준 사령관도 중국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던 것처럼 그 자신도 김성은 중령의 관사를 세 번이나 찾아가 겨우 김성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해병대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병대가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은은 1924년 12월 20일 경남 창원군 상남면 가음정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로 받은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이름도 ‘성은(聖恩)’으로 지어졌다. 그는 마을에서 가까운 상남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를 그러나 중학교부터는 만주에서 다녔다. 그가 만주로 간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렸을 때부터 김성은의 부친은 아들을 농사꾼으로 키우려고 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지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직업으로 농사가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성은은 어린나이에 만주에서 여관업과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숙부를 따라 만주로 유학해서 대도관중학교를 거쳐 하얼빈의 농업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김성은의 어릴 때 꿈은 군인이었다. 고향 창원에서 일제강점기 군사도시인 진해에는 일본 해군과 육군부대가 있어 자주 그곳을 방문하여 군함도 보고 육군부대시설을 보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찾아온 8·15광복은 김성은의 군인으로서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하얼빈농대 3학년 때 광복을 맞은 김성은은 그곳을 점령한 소련군과 중국인으로부터 교포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중학교와 대학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고려자위단’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일본군이 물러간 만주지역은 소련군의 횡포와 치안부재 상태를 노린 중국인들의 노략질이 성행하면서 김성은이 조직한 고려자위단은 교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됐다. 김성은은 소련군과 협상하여 하얼빈지역의 교포들을 태우고 갈 기차를 협조하여 국내로 들어오던 중 중국공산군의 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해졌으나 정일권 장군의 도움을 받아 이를 모면하게 되면서 서로 알게 됐다.

 

■ 해병대를 용맹의 상징으로 부각시켜…

국내에 들어온 김성은은 어느 날 고려자위단(高麗自衛團) 동료로부터 정일권이 찾는 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가 국방경비대에 들어올 것을 권유받고, 그의 추천으로 1946년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손원일 제독이 나타나 정일권에게 해군에도 사람이 필요하다며 막 임관한 김성은에게 해군을 권했다. 이에 김성은은 고향에서 가까운 진해에 해군을 창설한다는 말과 손원일의 제독의 인품에 끌려 정일권에게 양해를 구하고 해군을 택하게 된다. 이후 해군소위로 임관한 김성은은 목포기지사령부, 부산기지사령부, 묵호기지사령부, 진해특설기지사령부에서 해군장교로서 갖추어야 될 주요 보직을 쌓게 됐다. 해군장교로서의 전도가 밝았다. 그러나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수주둔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의 반란은 그의 군대 운명을 다시 한 번 바꿔 놓았다. 여순 10·19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해병대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해병대가 창설됐다. 해병대 초대사령관에 임명된 신현준은 진해통제부 교육부장으로 있던 김성은 중령을 해병대 참모장으로 영입하면서 김성은은 결국 해병대로 가게 됐다. 당시 해병대는 연대급에도 못미치는 규모였기 때문에 기껏해야 대령정도로 군대를 마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존경하는 신현준 사령관의 간절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전도가 유망한 해군을 버리고 해병대를 선택했다. 김성은의 인간적 배려와 의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김성은과 해병대의 운명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으로 대반전을 이뤘다. 6·25전쟁은 해병대를 용맹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국군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해병대는 전쟁 중 김성은이 지휘하는 김성은부대의 활약으로 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해외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됐다. 개전초기 해병대는 육군에 배속되어 지연작전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고길훈(高吉勳, 해병소장 예편) 부대가 이를 수행하다가 후에는 김성은 부대가 고길훈 부대를 통합해 수행했다. 고길훈 부대는 모슬포부대 1대대를 기간으로 편성돼 1950년 7월 15일 군산에 상륙하여 군산·장항·이리지구에서 호남으로 우회기동(迂廻機動)하는 북한군 제6사단과 교전했다. 이후 고길훈 부대는 7월 22일 여수에 상륙한 김성은 중령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부대명칭도 ‘김성은부대’로 개칭됐다.

이때부터 김성은부대의 활약이 시작됐다. 김성은부대는 지연작전과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지연작전시 김성은부대는 민기식(육군참모총장 역임) 대령이 지휘하는 ‘민(閔)부대’에 배속돼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에서 적을 격퇴했고, 이후 미 제27연대에 배속돼 진주방어에 가담했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시 김성은부대는 마산 서쪽 진동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정찰대대를 기습 공격하여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고, 이후 미 제25사단의 반격작전 때는 진동리-마산간 보급로를 타개하고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해 낙동강 서부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김성은부대가 해병대를 세계적인 군대로 만든 것은 통영상륙작전이었다.

 

■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통영상륙작전은 북한군 제7사단이 전략적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봉쇄하기 위해 통영을 점령하자, 해군본부는 이의 탈환임무를 김성은부대에 부여했다. 김성은부대는 1950년 8월 17일 통영해안에 한국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하고,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 확보해 낙동강 서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김성은부대의 신속한 작전을 본 외신기자들이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보도함으로써 해병대는 일약 ‘귀신 잡는 해병’의 명성을 얻게 됐다. 이후 해병대는 세기의 작전으로 불러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면서 그 명성을 떨치게 되면서 해병대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됐다. 그렇게 해서 제1해병연대가 편성됐고, 초대 연대장에 김성은 대령이 임명되면서 그는 또 한 번 해병신화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정선, 영월전투와 홍천전투 그리고 도솔산전투를 통해 해병대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애칭을 또 다시 받게 된다. 해병대가 군의 일원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김성은이 있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김성은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숱한 무장훈장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때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제1전투단으로 확장되고, 이어 해병여단에서 해병전투사단이 창설되면서 김성은도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이들 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전투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해병대를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 김성은은 6·25전쟁시 전투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과 창의적인 지휘기법을 발휘하여 항상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다. 모두가 불가능한 전투라고 꺼리고 상대하기 어려운 싸움이라며 피하는 전투를 도맡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례(一例)로 사천강전투 때 보여준 김성은의 창의적 지휘기법은 지금도 해병대에서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중공군과의 사선을 넘나다는 혈투에서 김성은 전투단장은 중공군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이루어진 막대한 포병사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속에 각개병사가 엄폐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개인호인 일명, '토끼굴(rabbit hole)'을 미리 구축해서 적의 포병사격에 대비케 하는가하면, 적의 포병사격이 끝나고 적 보병이 공격해 오면 지휘관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안전한 토끼굴에서 일제히 나와 중공군의 보병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미군 지휘관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김성은 장군은 전투 때마다 전투상황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길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한 다음 침착하게 이에 대응함으로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해병대와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살았던 장군

원칙과 강직함 그리고 청렴결백함의 상징이었던 김성은 장군은 1960년 4·19후 해병중장 진급과 동시에 제4대 해병대사령관에 취임한다. 이어 5·16이 일어나면서 해병대사령관으로서 군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2년 2년간의 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16년간 몸담았던 군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능력이 출중하면서 겸손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김성은 장군을 국방부장관으로 전격발탁하게 된다. 국방부장관에 취임하게 된 당시 국내 상황은 제3공화국 출범 전후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때 김성은 장군은 뛰어난 친화력과 업무추진력을 발휘하여 군과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군 현대화와 베트남 파병 그리고 향토예비군 창설 등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5년간의 장관직을 물러나게 된다. 이어 대통령 안보특별보좌관, 해병전우회중앙회 총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고문, 해병대전략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하다 2007년 5월 15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평생을 오로지 국가와 민족 그리고 해병대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며 살았던 장군이었다. 장군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당시 국가적으로 가장 현안이었던 전시작전지휘권 반환에 결사반대하며 5월의 뜨거운 광화문 광장의 아스팔트 뙤약볕에서 노구를 이끌고 참전용사들의 선두에 서서 힘쓰시다가 운명을 맞게 된다. 살아생전에는 가장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전투지휘관 및 국방장관으로 군과 국가안보를 위해 힘썼고, 그것도 모자라 퇴역 후까지 국가안보와 나라걱정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장군은 항상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차분한 음색에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감과 편안함을 심어줬다. 차가운 겨울날씨 탓인지 그런 장군의 따뜻한 음성과 훈훈한 미소가 그립다. 장군이 가신지도 어언 7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지만 장군을 기억하고 장군의 전공과 업적을 기리는 분들의 수는 세월의 흐름만큼 점차 많아지고 있다. 베풀고 이해하고 배려한 장군의 삶의 흔적이 자연스레 그런 결과를 낳았지 않나 싶다. 뛰어난 지모와 용맹으로 귀신잡는 해병의 전통과 짧은 시간에 세계 최강의 해병으로 발전시킨 김성은 장군의 공로는 국군 및 해병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또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조국 근대화와 국군현대화 그리고 국가안보에 기여한 장군의 숨은 업적은 역사가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장군이시여 부디 호국신(護國神)으로 거듭 태어나 자랑스러운 ‘통일한국’을 영원히 굽어보시길! 【남정옥 역사학박사】

김성은 장군은 6.25 전쟁 당시 한국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 통영상륙작전'(사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얻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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