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기사’는 뒷날 ‘역사’가됩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는 지면의 제약이나 그당시 시국의 상황으로 쓰지 못했던 기사들이
빛바랜 노트에 유산처럼그대로남아있습니다.
이제 그런 기자들의 유산들을 이 이야기에 담습니다. 우리나라 원로기자들의 모임인 대한언론인회는 그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이같은 책들을 펴냈으며 이 이야기는 청미디어 발간 도서 ‘취재현장의목격자들’에서 발췌하여 시리즈로 개제합니다.

○베트남에서 나라무너지는 것을 봤다

최서영­ 1933년강원도강릉생, 서울대정치학과졸, 도쿄대학대학원, 서울신문. 조선일보기자, 경향신문정치부장, 일본특파원, 편집부국장, KBS 보도국장 방송이사(총국장),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코리아헤럴드 사장, 한남대학교초빙교수

내가 처음 베트남에 특파된 것은 우리나라 군대가 파병되기 전인 1964년 여름, 통킹만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미국이처음으로하노이를폭격하면서월남전에본격개입하게된때였다. 이로부터베트남이망할때까지 나는 세 번 사이공에 특파되었다. 
아득한 옛일이지만 한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꼴이 되어 모든 것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우선 처음으로 사이공에 특파되었을 때 일이다. 내가 맨먼저 맞닥뜨린 것은 전쟁보다도 군부 쿠데타와 학생 데모였다. 구엔 칸이라는 육군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연일 데모가 일어났다. 
이에 열흘을 견디지 못하고 구엔칸이 물러나자 베트남군부는 매일 회의를 열고 국가원수 선출을 꾀했으나 군부실력자들의 갈등과 암투때문에 번번이 실패, 국가원수 없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불교도와 가톨릭 신도 사이에 싸움이 붙은 종교 폭동이 일어났고 사이공 거리에는 승려들의 분신 자살 사건이 꼬리를 잇는 소란이 벌어졌다. 
베트남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초반부터 이와같이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었고 국민들은 각기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四分五裂), 내부가 갈가리 쪼개져 있었다.
내가 베트남에 두번 째로 간 것은 우리나라 군대가 참전한 후인 1966년이었다. 2년 전과는 달리 사이공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300여 명의 특파기자들이 취재경쟁을 하고 있었다.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사이공시청옆의 미국해외공보처(USIA)에 기자들이 모여 전황 브리핑을 듣는것이 일과였다. 그러나 이곳의 설명만으로는 베트남 사태를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이곳 사태는 외환(外患)보다는 내우(內憂)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대를 차례로 찾아 취재를 했다.
당시 베트남에는 30,000 명의 우리군인들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중부지역 퀴논에 육군맹호부대, 동쪽 바닷가 뚜이호아에 해병청룡부대가 연일 전투를 벌이고있었다. 그런데 취재를 하면할 수록 베트남의장래가 암담하다는 생각이 깊어갈 뿐이었다. 
우선 맹호부대에서 다음과 같은 실화를 들었다. 얼마전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우리군은 많은 무기와 장비를 노획했는데 놀랍게도 그 속에는 아직 넘버도 적혀있지 않은 최신형 지프가 몇 대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군용차는 미군이 최근에 도입해 아직 일선 부대에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어느 군수창고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신형 차량이 부두에 닿자마자 미군부대로 간 것이 아니라 차량번호도 매기기 전에 곧바로 빼돌려져 베트콩 쪽으로 밀송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해석이다. 
나는 베트남이 망하기 전 세 번째로 잠시 사이공에 가서 취재를 한 일이 있다. 이때는 더욱 절망감을 갖게 하였다. 중앙정부는 통치능력이 없는 명목상의 정부였다. 
고위 관리들은 대부분 가족들을 프랑스나 미국에 피란시켜 놓고 여차하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이 시중에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전쟁을 해야 할 장군들은 군벌화되어 봉건영주처럼 관할구역에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이때의 베트남 월남공화국은 나라라고 할 수가 없었다. 통치기능이 마비되고 공동체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어떻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는 말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 딱 들어맞는 격언이다. 베트콩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개별 전투에서는 대부분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전쟁의 주체는 바로 베트남군대와 국민들인데 이들은 “이겨보겠다”는 의욕도 의지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베트남의 역사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깊이깊이 성찰해야한다.

○사소함이 역사를 바꾸는 것을 봤다

포승줄에 묶인 김재규

내가 언론인 생활에서 가장 통절히 경험한 것은 역사를 바꾸어 놓은 큰 사건도 때로는 사소한 일이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신체제를 끝장 낸 10·26사건이 바로 여기 해당된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KBS의 방송이사(총국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은 KBS와 직접 관계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 사건의 한 단면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뜻에서 그때 얘기를 하고자 한다.
사건 당시 공식적으로 발표된 박 대통령의 그날 일정은 충청남도 삽교천의 방조제 준공식 참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당진(唐津)에 있는 KBS 단파방송 송신소를 찾아 기념식수를 하고 대북(對北)방송 현황을 보고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궁정동에서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면 왜 대통령의 이 마지막 행사 참석이 발표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KBS의 당진송신소가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 방송의 기간시설이기 때문에 국가 보안규정상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물론이고 시베리아와 먼 중앙아세아까지 방송청취가 가능하도록 
단파 출력을 강화한 이 송신소의 보강공사는 KBS와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몇 달 동안 철야작업을 해가면서 애써온 사업이었다. 
나도 몇 번 현장을 가본 일이 있다. 그런데 행사 전날 청와대 경호실에서 통지가 왔다. 대통령은 예정대로 참석하지만 정보부장이 대통령과 동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방송사측도 참석인원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KBS에서는 사장(최세경)과 기술담당 이사(김종면)만 참석하고 방송담당인 나는 빠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주동이 되어 만든 시설 준공행사에 그것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정보부장이 빠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일이 이렇게 어긋날 만큼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사이에는 반목과 다툼이 극심했던 것이다.
그해(1979년) 10월 16일 일어난 부산 마산 일대의 이른바 부마(釜馬)데모사태 해결책을 놓고 경호실장과 정보부장 간에 의견충돌이 심하다는 얘기가 언론계에 널리 퍼져있던 때였다. 
내가 듣기로는 김재규 정보부장은 당진으로 가는 헬리콥터에 박 대통령과 으레 동승하는 줄 알고 보고사항을 꼼꼼히 챙기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사 전 날 청와대 경호실에서 헬리콥터에 동승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김재규는 책상을 내려치면서 “차지철 이놈 그냥 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다 한다.
짐작컨대 김재규 정보부장은 자기를 끝내 따돌리려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차지철을 두둔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슷한 섭섭함과 미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의 KBS 행사에 만약 박 대통령과 김재규 부장이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참석했더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박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어깨라도 두드리면서 
“김 부장 수고가 많네”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만 했었더라도 그날 밤 김재규가 권총을 빼드는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의미가 없지만 
이와 같이 한 방송사의 조그마한 지방 송신소 준공식 행사 하나가 세상을 뒤바꾼 큰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나는 직접 목격했다.
김재규의 범행은 그 후 재판과정을 거쳐 그 전모가 밝혀졌지만 그는 대통령을 죽인 다음 나라의 판을 어떻게 다시 짜보겠다는 준비된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의 행동은 유신체제를 끝장내고 민주화를 이루어보겠다는 정치적 행동과는 얼토당토않은 짓이었다.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열차에 실려 있는 화약고를 터뜨려 도시를 파괴시킨 
지난날의 이리(裡里)역 참사사건처럼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10·26사건은 이렇게 사소한 일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각자가 지니는 경력을 중시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 교훈을 얻고 모든 사안을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복안력(複眼力)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난날 우리가 저질렀던 어리석음을 앞으로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