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특집
智·德將(지덕장), 강기천 대장(大將)의 6·25 Story6·25와 강기천 대장(大將)의 감동 이야기
故 강기천 제7대 해병대사령관

■ 강기천 대장의 일생(1927.11.11.~2019.11.19.)
강기천 대장(大將)은 최초 직급이 해군훈련대장(隊長)과 해군육전대장(隊長)으로 시작했다.
대장(隊長)으로 시작한 군인의 일생이 해병대 최초 4성 장군 대장(大將)으로 막을 내린 해병대의 영광된 역사의 주인공이다.
명석한 두뇌와 인성을 중시하는 선친의 가르침으로 강기천 대장이 걸어온 군인의 길은 덕장(德將)과 지장(智將)의 길이었다.
그가 택한 군인의 첫발은 대한민국 건군기에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 간부요원으로 들어가 창군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 후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바뀌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해군으로 바뀌면서 해군 인재 양성의 모체인 진해 해군훈련대장으로 소임을 다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훈련생을 모체로 한 해군육전대장이 되어 동해안 포항 안강 지역으로 내려오는 인민군 5사단의 진로를 막아 부산까지 질주하려는 야욕을 분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강기천 대장은 월남전 파병 당시 제7대 해병대사령관으로 1966~69년까지 청룡부대의 용맹을 세계만방에 알린 주역이 되었다.
그는 2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정치와 사회단체의 주도 역할을 마치고 92세의 나이에 타계한 군인이고, 정치가, 기업가, 대학교수였던 대한민국 해병대를 빛낸 최초 4성 장군이다.

■ ① 감동이야기 “그 착한 마님을 죽여선 안 된다!”
호남 지역은 1950년 7월 16~26일까지 불과 10일 동안 적의 수중에 들어간 곳이다.
불과 10일간이라 하지만 공산군의 악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즉, 당시 호남 지역 침공 북한군 6사단은 다른 지역에서처럼 경찰관, 군인 가족 또는 우익계 인사 가족들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는데, 전남 영암이 고향인 강기천 일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공산군이 영암을 점령했을 때 강기천 대장의 양친과 16살, 14살짜리 두 남동생과 세 여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 강 대장 아래 동생 남주와 화엽은 해군에 입대하여 진해에 대기 중이었을 때였다.
당시 강기천 해군육전대장 부친은 일본에서 기계공학을 이수한 인텔리 층으로 목포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다가 전쟁이 나자 고향인 영암 회문리로 와 정미소를 운영했다.
그해(50년) 9월 인민군은 아버지를 내무서(영암경찰서)로 끌고 와서 정미소를 돌리라고 명령했고, 아버지는 화장실 가는 척하다가 탈출하여 양조장 대형 술통 속과 들판 노적가리 속에 파고 들어가 숨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의 반격이 있자 인민군이 쫓겨가면서 아버지를 놓친 분풀이로 어머니를 처형하려고 끌고 왔다.
처형을 하려던 순간에 ‘아지’라는 별명을 가진 처형장 하수인의 아버지가 “우리를 살려준 그 착한 마님을 죽여선 안 된다!”고 소리를 쳤다.
그 소리가 ‘아지’와 다른 적색분자의 마음을 움직여 어머니가 극적으로 형장에서 풀려났다. 그야말로 감동의 드라마였다.
전쟁이 끝난 후 ‘아지’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던 이유는 “강 대장 아버지가 일제 때부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적선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동네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퍼졌다.
그 후부터 강기천 가문엔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남는다)이라는 가훈이 세워졌다.

■ ② 감동이야기 “내 오빠가 강기천이예요”
전남 영암군 신북면 시가에서 피난을 안 가고 시가를 지키고 있던 사촌 누이동생의 이야기다.
경찰이 인민군에게 부역한 자들을 찾아 총살시킬 때였다.
시집간 강기천 사촌 누이동생이 피난을 못 가고 시어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그 집으로 들어와 “밥을 해내라. 잠잘 곳을 만들어라” 하는 강압에 못 이겨 목숨을 부지하려 제공했던 것을 공산군에게 부역했다는 명목을 붙여 끌고 와서 사형대에 묶어 총살하기 직전이었다.
사형 집행 경찰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라” 하자 “나의 오빠가 해군소령인데 어찌 내가 본심으로 그런 짓을 했겠시요”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경찰은 “오빠 이름이 뭐냐” 물었고, “강기천이에요” 이름을 말하자 그 경찰관은 깜짝 놀라면서 잠시 서류를 보더니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얼른 풀어줬다고 한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강기천 신병교육대장 당시 어느 날 알만한 경찰로부터 자기 동생이 해군 신병교육대에 갔다가 도망 와서 자신이 집에 있는데 잘 설득해서 데려갈 테니 선처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강기천 교육대장은 그 도망병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고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실무에 배치했는데, 바로 그가 누이동생을 살려준 경찰이었다.
이 또한 명심보감의 적선지가(積善支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의 살아있는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 해군 3형제의 맏형님
강기천 대장은 아들 5형제와 딸 3형제의 장남이다.
아래로 두 동생 남주(南柱)와 화엽(化燁)이 모두 해군으로 입대한 해군 3형제였다.
첫째 아우 남주는 해군 기호사(암호사)로 함정 근무 중 1951년 12월 26일 해군 PC-704함이 원산만 근해에서 적의 기뢰를 맞아 침몰할 때 양도까지 헤엄쳐 해변가 바위를 끌어안은 채 21세 꽃다운 나이에 장렬히 산화했다.
둘째 화엽은 해군 목포경비부와 전투함 승조원으로 근무하다가 병장으로 제대했다.
【신동설 발행인】

6·25전쟁 당시 제5대대장 시절 강기천(右1) 사령관이 <좌측부터>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박광원 중위, 김성은 제1전투단장과 함께 한 모습(1952.10.)
월남전 당시 해병대사령관으로서 청룡부대를 방문해 부하들을 격려하는 모습(1969)

1969년 1월 1일부로 대장으로

승진한 제7대 해병대사령관

시절의 강기천 사령관.

당시 달마도 작가였던 이종철(해병 145기) 화백을

초청해 달마도 작품을 보고 있는 강기천 장군 내외.

강기천 사령관 묘비 사진

 

 

 

 

 

 

 

 

 

| 추도사 |

○ 사령관님의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강기천 사령관님.
사령관님은 53년 전인 1966년 12월, 제가 해병대에 입대했을 때 최고 상관인 제7대 해병대 사령관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복무방침은 ‘출전준비(出戰準備)’였고 그 네 글자는 베트남전에서 청룡들의 핵심정신전력이 되어 신화를 창조한 해병대의 명성을 얻었고 저에게는 70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인생지표가 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령관님의 존함은 제 일생동안 가슴속에 각인되어 정의로운 해병대 길을 가게 해주신 스승이고 해병대의 아버지이십니다.
얼마 전,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건강과 총기를 잃지 않았던 어른을 오늘 하직 인사를 올린다는 것이 꿈만 같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사령관님.
제가 해병대전우70년사에 실릴 격려사를 요청했을 때 “내가 살아생전에 해병대 70년 역사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나의 90여 생애에서 그 어느 직위나 계급보다도 해병대라고 불린 것이 가장 큰 영광이고 자랑이었다”고 소회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령관 재임 시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부하 장·사병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는 애도의 아픔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면서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후손들에게 잘 이어가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령관님이 가진 해병대 가치관이고 해병대 최초 대장님의 비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령관님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희에게 큰 교훈을 주고 가신 사령관님께 감사합니다.
사령관님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선비사상의 훌륭한 가통을 이었던 분이고 강인한 무관의 길을 걸어오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셨던 분입니다.
사령관님은 “나의 아버님은 당시 뛰어난 기계공학의 선구자였고 나는 초대 해병대 교육대장이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해병TV 방송위원장직을 수락하셨습니다.
그런 분의 장남이 유명한 교수가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장남 강승필 교수 부부와 따님 세 자매와 사위들과 사랑하는 손자·녀들을 남긴 채 사랑하는 아내 추희정 여사님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사령관님의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혈육의 정을 두고 가셨으니 어찌 그 슬픔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저희는 사령관님을 놓아드려야겠습니다. 아무 염려와 걱정이 없는 곳에서 영면하십시오.
저희는 사령관님의 가르침과 그 정신을 잘 이어받아 사령관님이 못 다하고 가신 해병대의 위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해병대 최초 4성 장군 강기천 사령관님이 뿌리신 그 밀알이 해병대 4성 장군의 역사로 영원히 승화되도록 모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희가 되겠습니다.
저를 해병대로 낳아주신 사령관님.
부활의 아침에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하직 인사를 마쳐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필승!

지난 2019년 영결식 당시 신동설 본지 발행인의 추도사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무적해병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