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 깊은 정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
김일성은 중국에 대해 깊은 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내가 근무하는 기간 동안 이런 느낌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4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15주년 기념일을 맞아 하오 대사는 대사관에서 경축 연회를 베풀었는데 김일성 수상이 친히 조선지도자들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5일 중국지원군(중공군) 6·25전쟁 참전기념일에도 중공군 대표단이 당시 정치위원을 맡았던 왕핑(王平) 단장 인솔로 북조선을 방문했을 때 김 수상은 이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김 수상은 “중국 지원군의 국제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이 조선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투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조선의 복구를 지원한데 대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었다.
이 기간에 김 수상은 하오 대사를 단독으로 만나 중요한 정황(政況)을 알려주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중국어로 이야기 해주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하오 대사는 밤늦게까지 그날의 면담 내용을 자세히 적어 베이징에 보고하곤 하였다.
이런 사이에 중국의 중요한 지도자들도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주요 인사들을 만났으며 긴요한 문제들을 협의했다.
1964년에는 김일성이 비밀리에 직접 조선전문가들을 데리고 동북지방(만주)을 방문, 중요한 공장 등 시설을 둘러보고 이 방면의 기술자들로부터 배워가기도 했다.
언젠가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국 전문가들을 뽑아서 동북지방에 보내 김일성을 만나보고 토론하도록 지시했던 일도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같이 비슷한 현장을 통역으로 많이 지켜본 나로서는 두 나라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 간부학교에서 다시 베이징으로
1969년 조선에서 소환되어 마오쩌둥 주석의 명에 의해 5.7간부학교로 하방(下放)되었다.
먼저 헤이롱장(黑龍江)성의 오상현(五常縣)으로 파견되어 벌목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리고 꽃피는 철부터 추운 겨울까지 반년 동안 땅을 갈고 농사를 돕는 등 일을 하고 그 후반에는 전투 준비 명령에 따라 후난성 유현(攸縣) 5.7간부학교로 보내어 져서 거기서 찻잎을 따고 심는 등 일을 거두며 난방 시설도 안 된 찬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어렵게 지내야 했다.
70년 6월 20일 그곳 5.7간부학교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 노동을 하고 있는데 공작의 필요성이 있다며 급히 베이징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둘러 온 몸에 젖은 땀과 손발에 묻은 흙더미들을 털어내고 간단한 물건 등 소유물을 챙겨 간부학교에서 마련해준 지프차를 타고 현청 소재지에 도착, 그곳에서 밤 열차를 타고 상하이를 거쳐 이튿날 베이징에 도착했다.
외교부 아주(亞洲)국에 들어가니 진흙투성이에 검붉게 탄 얼굴에 야윈 모습을 보고 여러분이 어서 옷을 갈아입고 곧 조선에서 올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나는 비로소 지난 5월 20일 마오 주석이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졸개들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 6·25조선전쟁 발발 20주년을 맞이하여 베이징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벌이는데 조선 측에서 박성철(朴成哲) 제2부상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노동당 대표단이 참가하는 바 이들에 대한 통역 임무를 나에게 부여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긴장하였다.
지난 1년여 동안 외국 문서들을 접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간부학교에서는 온 종일 노동만 하고 지내어서 국내외 정세에도 밝지 않고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지낸 처지였다.
아무리 통역에 능하다 해도 마음속으로 퍽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여행의 피로를 잊은 채 밤 새워 자료를 찾아보고 외교문서들을 숙지해 보며 창칼을 다듬고 준비를 갖춰 전투에 나가는 심정으로 바삐 서둘렀다.
6월 24일 상오 조선대표단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인민대회당에서 저우 총리와 회담이 시작되었다.
저녁에는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베풀어졌다.
나는 기회가 있어 다시 저우 총리를 만나 뵙게 되어 매우 기뻤다.
다만 저우 총리도 문혁(文革) 기간에 몹시 피곤하여 수척해 보였으며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회담이 곧 시작되기 전에 저우 총리가 힐끔 나에게 눈길을 보냈는데 나는 막 간부학교에서 뛰어올라왔다고 말했고 총리는 ‘음’ 하고 소리를 내고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온 힘을 쏟아 회담과 만찬 때 통역을 다 해냈다.

■ 마오쩌둥 주석을 위한 첫 통역
그 다음날 26일은 나에게는 가장 긴장되면서도 잊지 못할 날이었다.
이날 오후 마오 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조선대표단을 접견했다.
몸집이 우람한 마오 주석이 회색 중산복을 하고 회견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나는 흥분하여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번이 마오 주석을 위해 통역하는 첫 번이자 이 노인장을 이처럼 가까이서 대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마오 주석은 입구에 나아가 그들을 영접하고 일동과 악수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와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마오 주석의 뒤에 앉았다.
통역을 하기 전 비로소 마오 주석의 진한 후난(湖南) 사투리 발음을 들었다.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나에게 어떤 말은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때 마오 주석이 나를 둘러보고서 “자네 어디 사람인가?”라고 물었고 나는 “베이징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말하기를 “그럼 내가 베이징 말을 시험해 보지.”하며 탁상 위의 성냥갑을 들어 보이며 “이것을 뭐라고 하지?” 물었다.
나는 황급히 “성냥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 주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곧장 “서양 불갑(洋火)이라고도 합니다.”라고 다시 말했다.
마오 주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 부지불식간에 영감이 떠올라 “불을 붙여 드릴까요?”라고 말할 생각이 났다.
이때 마오 주석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좌중에서도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긴장한 마음이 다소 풀리는 듯 했다.
그리고 주석의 말도 듣기에 쉬어보였다.
이날의 통역 임무도 애써 간신히 끝냈다.
회견이 끝나자 저우 총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음 놓아라. 그렇게 긴장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씀이 나에 대한 비판이며 격려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았다. <계속>

김일성(좌)가 마오쩌둥. 사진은 50년대의 모습.

▲ 박 실 초역 / 전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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