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사관에서 임무 시작

김일성 수상이 거처하던 수상부 뒷면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제외하고는 지리적으로 유리하고 큰 공관이었다.
<※ 참고로 베이징에 있는 북한 대사관은 중국 외교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건국문외 일단공원로(建國門外 日壇公園路)’ 11호에 있다.
미국, 일본 대사관 등이 모여 있는 외교가에 있고 부근 소련대사관과 같은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집무동 외에 수영장과 앞마당에 세워진 김일성 기념탑과의 사이에 숙박 동이 있어 호텔겸용으로 공관원들이 살고 있으며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요 인사들이 투숙한다. 편집자 주석>
나에게는 대사관의 문서 번역과 통역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뭐든지 처음으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이 때 중국과 북한은 매우 긴밀한 사이여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중요 인사들이 많았는데 마침 류샤오치(劉少奇) 주석이 방문한 직후였다.
공관원들의 외부 활동도 빈번했으며 나는 외빈접대 등 의전업무도 맡게 되었다.
일이 많아 과외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당연한 일로 치부하였다.
당시 공관장은 오랫동안 공산당 활동을 한 하오더칭 대사였다.
그는 1907년생으로 일찍이 20대에 공산당에 가입, 지하활동을 한 베테랑으로 인민정부수립 후에는 충칭(重慶)시 당위원장과 시장을 지냈고, 산감녕(산시성, 감숙성 및 녕하지구 일보) 편집장을 지냈으며 외교부에서는 헝가리 주재대사도 지낸 분이었다.
1961년 7월 김일성이 베이징에서 중조우호협력호조조약을 체결할 때 마오쩌둥 주석 및 저우언라이 총리와 같은 자리에 배석했다.
그 후 조선노동당의 최용건(崔庸健) 등 주요 인사들과 중국 국가 주석의 양국 방문 때 일을 잘 처리 하여 중앙의 신임을 받았던 분이었다.
첫 임지인 평양에서 하오 대사를 만난 것도 나에게 행운이었다.
하오 대사는 사실 이번이 첫 만남은 아니었고 1963년 (북)조선의 최용건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를 안내하려 일시 귀국했던 하오 대사와 그 일행을 베이징에서 통역하게 되었다.
큰 키에 엄숙한 표정, 함부로 실없이 언행을 하지 않던 성품 등으로 나와는 몇 마디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때 생각하기로 이런 분을 지도자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누가 상상했으리요. 몇 개월 후에 그분을 만나 함께 일하게 될 것임을….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오 대사는 많은 사람을 만나 회견하고 연회에 초대하고 김일성 수상 등 북조선의 유력 인사들을 접촉하는 등 중국을 위한 활동을 했다.
나는 그를 도와 일정을 짜고 외출 때 자동차를 수배하고 대외적인 연락을 취하며 활동 결과를 정리하여 본국에 전문보고 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역시 매우 신중히 추호도 실수가 없도록 정확히 통역과 번역을 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 하오 대소와의 기억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조선 외무차관을 만났을 때 조그만 실수가 생겼다.
하오 대사가 이야기하는 문제에 나는 사전 준비가 없이 통역을 하게 되어 알지 못하여 통역이 순탄치 못하고 더듬거리게 되었다.
대사는 그 자리에서 즉각 나의 통역을 중지시키고 조선쪽 통역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대신 통역하도록 하였고 나도 잘 듣도록 했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서 나는 호된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조마조마 했으나 나무라지 않고 이런 일이 생긴 원인을 생각해보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내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고 (조선사람들) 대면 접촉도 많지 않아서 통역이 잘못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서 이번 일을 교훈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음에 대외 인사를 만나러 갈 때는 용건을 미리 귀띔 해주고 자료를 보여 줄 테니 마음속으로 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의 말씀에 자책을 하며 다음에 그를 수행할 때는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 몇 년 사이에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이념분쟁이 발생하자 공관원들은 이런 정세의 추이를 관찰하고 국제정세의 변화 등을 종합 판단하여 국내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방법 등에 관해 본국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의 하나가 되었다.
하오 대사는 관내의 주요한 회의에서 우리가 본국정부의 주요한 귀와 눈으로 참모가 되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의무임을 강조하곤 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몸소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1층 대사실에 눌러 앉아 연구에 열중하고 매일 상황을 점검하며 때로는 연구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발표되는 국제 문제에 대한 장문의 논설에 대한 반응을 주시하고 대사관에 입수되는 정보와 자료가 제한이 있으므로 대사관내에 조선어를 해독하는 인원들을 총동원하여 번역에 돌격하도록 조직, 토론하여 견해를 적어내도록 하였다.
60세가 넘어선 자신은 밤늦도록 보고문의 자료를 일일이 검토해내는 것을 보고 나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예의범절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분과 함께 외출할 때가 많았는데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중국과 서양 복식을 갈아입으며 특히 짙은 흰색을 좋아했다.
뛰어난 신체에 중국의 대표임을 보이는데 손색이 없었다.
관내 직원들에게는 의복 등 외모를 갖추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주의를 주곤 했다.
그는 (북)조선외교단장을 지냈는데 이 방면에도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한번은 평양소년문화궁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했던 바 일을 마친 각국 대사들의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는데 선두에 있던 하오 대사의 차가 고장을 일으켰다.
뒤따르던 다른 외교사절들이 차량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장시간 혼란을 일으켰다.
화가 무척 난 그는 대사관에 돌아오자마자 책임부서장과 운전기사를 크게 나무랐다.
그 뒤로 차량이 외부로 나갈 때는 가급적 세심한 검사를 하여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도록 주의했다.
이런 일들은 벌써 40여 년 전에 발생한 것들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엊그제 같이 생생히 기억에 살아있다.
나는 1992년 한국대사로 부임할 때 그를 한번 댁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결코 생각지 못했다.

■ 처음으로 만난 김일성
대사관 통역을 맡고 있던 나는 김일성 수상 등 북조선의 여러 지도층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김일성 수상을 대면한 것은 1963년 11월 조선노동당중앙당 빌딩에서 김 수상이 조선의 형세에 대하여 평양주재 각국 대사들에게 설명해주던 자리에서였다.
하오 대사를 수행하여 대회당에 들어갔는데 그때 하오 대사는 외교사절단장은 아니었으나 제일 앞쪽 소련대사 옆에 자리를 정해주었다.
각국 사절들이 모두 도착하자 김일성 수상이 따로 떨어진 방에서 나와 걸어 들어왔다.
중간쯤 되는 키에 50세가 막 지난 약간 뚱뚱해 보이는 체구에 검붉은 용모를 보였으며 씩씩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보였다.
정면 중앙에서 회의장과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 정좌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내용을 통보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 있던 주요 외교사절들로는 중국과 소련 등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이이어서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통역되었는데, 그는 일장의 연설을 마친 뒤 통역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잘못된 곳들을 시정해주었다.
이것은 김 수상이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확실히 알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날 그의 행동거지와 분명한 말소리 등을 들어보고 그가 꿀리지 않는 영도자임을 느꼈다.
김일성은 중국에 대해 깊은 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 내가 근무하는 기간 동안 이런 느낌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4년 10월 1일의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15주년 기념일을 맞아 하오대사는 대사관에서 경축 연회를 베풀었는데 김일성 수상이 친히 조선지도자들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5일 중국지원군(중공군) 6·25전쟁 참전 기념일에도 중공군 대표단이 당시 정치위원을 맡았던 왕핑(王平) 단장 인솔로 북조선을 방문했을 때 김 수상은 이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중국 지원군의 국제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조선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투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조선의 복구를 지원한데 대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었다.
이 기간에 김 수상은 하오 대사를 단독으로 만나 중요한 정황(政況)을 알려주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중국어로 이야기 해주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하오 대사는 밤늦게까지 그날의 면담 내용을 자세히 적어 베이징에 보고하곤 하였다.
이런 사이에 중국의 중요한 지도자들도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주요 인사들을 만났으며 긴요한 문제들을 협의했다.
1964년에는 김일성이 비밀리에 직접 조선전문가들을 데리고 동북지방(만주)을 방문, 중요한 공장 등 시설을 둘러보고 이 방면의 기술자들로부터 배워가기도 했다.
언젠가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국전문가들을 뽑아서 동북지방에 보내 김일성을 만나보고 토론하도록 지시했던 일도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같이 비슷한 현장을 통역으로 많이 지켜본 나로서는 두 나라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계속>

▲ 박 실 초역 / 전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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