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은 한때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적대 관계였다. 그러나 냉전의 해소로 소련 등 공산권이 붕괴되고 국제정치가 요동치는 판에 바로 이웃 간에 있는 두 나라가 관계를 개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나라가 관계를 개선한지 어느덧 4반세기가 되었다. 양국의 교역은 괄목상대할 만한 진전을 이뤄 중국은 우리의 가장 큰 무역 상대가 되었고, 급기야는 안보상으로 협력을 다지는 동반자 관계를 말할 만큼 진전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과 맺은 상호원조조약을 유지하는 등 언필칭 혈맹관계를 내세우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는 이웃으로 우리의 국토 통일에 영향을 미칠 국가 위치에 있다. 우리에게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예의주시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 독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정보는 체제상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마침 평양과 서울에서 상당 기간 근무했던 중국 고위 외교관(필명 延靜)의 회고록 등 자료가 입수되어 그 초록을 몇 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본보는 기왕에도 ‘6·25전쟁과 중공군’이란 책자와 이승만 외교의 비사 ‘벼랑 끝 외교의 승리’를 출판하여 독자들에게 이 방면의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여 절찬을 받은바 있다.

■ 조선어 전공을 택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1958년 베이징(北京)대학교 동양어학과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인연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한반도 문제와 씨름하며 보냈다.
원래는 문학에 소양과 취미가 있어 시나 소설 작가 또는 언론 기자로서 문필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고교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조선어를 전공하게 되었다.
베이징 대학 어문 계열에는 동양어학과로 조선어를 비롯 일본, 월남,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어과가 있었는데 그 중 인구 수가 많은 일본어를 선택하려 했지만 북조선과의 긴밀한 관계를 감안, 국가가 필요로 하는 조선어과를 선택하라는 권유를 받아드린 것이다.
그래서 마침 평양의 김일성대학을 나온 남한 출신의 조선어 교수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비교적 훤칠한 키의 이 교사는 서울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어 나는 처음부터 한국어 표준말을 익히게 되었다.
조선어과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 지방(滿洲)에 가서 말을 익혔는데 마침 조직의 명령으로 외교부에 배치되어 번역과 통역업무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일생을 좌우할 행운이었다.
1962년 가을 뜻밖의 행운이 겹쳐왔는데 그것은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는 서화청(西花廳)을 방문, 존경하던 저우언라이 총리 내의 분을 만나 뵙게 된 것이다.
저우 총리는 그 때 외교부장관도 겸하고 있었다.
나는 고된 어학훈련을 통하여 조선어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자 다시 중앙방송국 국제부에 나아가 실습을 하게 되었고, 북조선을 오가는 각종 대표단의 통역과 문서들을 번역하는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마침내 외교부에 선발되었다.
1962년 가을 조선에서 파견된 조선문화대표단을 맞아 처음으로 이들을 통역하고 안내하게 되었다.
이들 ‘붉은(紅色)선전예술단’은 연극, 무용, 가무원들로 구성되어 중국 여러 곳을 순회 공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중국 연예인들 일부도 이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하여 저우 총리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기왕에도 총리는 시간이 있을 때 국내예술단의 공연을 감상하거나 어쩌다가 현장에서 직접 논평과 지도까지 해주었다.
총리는 파격적으로 조선인 예술단원들과 일부 중국 연예인들을 서화청의 자택으로 초대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그는 중국인민정부의 수립 이후 혁명 노병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거주하게 된 중난하이의 서화청을 자택으로 선정, 사망 때까지 그곳에 기거했다.
나는 조선예술단을 안내하여 중국 공산당과 간부들의 거주지를 직접 방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겨우 26세에 불과했던 젊은이로서 총리 앞에서 통역을 하게 되어 당황하고 긴장하였으나 모처럼 어려운 기회인만큼 힘껏 최선을 다했다.
중난하이의 서북쪽에 자리한 서화청은 단독주택으로 아담한 앞 정원을 지나 집 뜰로 들어서자 저우 총리와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여사가 손님들을 일일이 악수하며 환영했다.
응접실에서 총리는 이들의 좌편에 앉고 나는 총리 뒤에 앉아서 통역했다.
먼저 ‘붉은예술선전단’의 활동을 듣고 차하하며 중국예술단을 지도해준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특히 총리는 덩 여사와 함께 중국 측 단원들의 이름을 열거해가며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가 장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긴밀한 관계를 누누이 설명하셨다.
이들을 조그만 식당으로 안내하고 덩 부인은 자리를 떠났으며 저우 총리는 같이 음식을 들며 내내 환담했다.
나는 식사 엄두도 못 내고 통역에 열중했는데, 이를 지켜본 총리께서 잠시 담소를 멈추고 내가 간단한 음식을 먹도록 배려해주셨다.
이날의 경험은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교육이 되었다.

■ 평양주재 중국 대사관으로
1963년 10월 나는 처음으로 중국을 떠나 평양에 있는 중국대사관으로 부임했다.
베이징과 평양간은 민간항공편이 있었으나 외교부의 극히 일부만 이 비행기를 이용했으며, 대부분은 국제선 열차를 타고 다녔고 나도 이 열차를 이용했다.
열차는 퍽 쾌적하고 빠르며 첫날 오후에 기차를 타면 이튿날 정오에 평양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중국공무원들은 이 열차를 타고 다녔으며 차 속에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열차에는 일등 침대칸과 보통 침대칸이 있었으며 앞쪽에 보통 칸, 뒤쪽에 우등 칸을 달고 다녔다.
국경도시 단동(丹東)에 도착하여 압록강을 건넌 뒤 조선쪽에서 2칸 객차를 더 달고 평양으로 직행했다.
처음으로 해외 파견근무를 하게 된 나는 업무를 잘 처리 할 수 있을까 염려되며 크게 흥분했다.
떠나기 전 해외 공관근무를 해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외국에 나간 적이 없어 반백의 부모님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셨다.
자신들은 건강이 양호하니 집안일은 조금도 염려 말고 전심전력 대사관 일에만 열중라고 말씀하셨다.
베이징역에 전송 나오신 부모님들과 작별하고 보통 칸에 올라탔다.
일등칸과는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4명이 한 컴파트먼트(구간)에 탔으며 침대가 그렇게 부드럽지는 않았으나 첫 해외여행 길에 오른 나에게는 융숭한 대접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고 밤잠 설쳤다.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날 단동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철교를 통해 강 건너 조선 땅 신의주에 첫발을 디뎠다.
앞으로 20년 동안 이 열차를 타고 베이징과 평양을 그렇게 많이 오고갈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고 4시간이 지나 평양에 도착하니 대사관 판공실 과장 장 선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대사관으로 가는 차속에서 장 선생은 주변 연도의 풍경을 소개 설명해주었다.

■ 처음보는 평양
평양 거리는 넓고 건물들도 우람해 보였으며 행인들의 의복이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단정했고 행동거지가 퍽 점잖고 예의 있게 보였다.
조선전쟁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던 평양시내가 이처럼 빠른 기일 내에 복구된 것을 보고 경외심마저 들었다.
스탈린대로를 지나 천리마 동상을 돌아 멀리 가지 않아서 평양시 북구 모란봉 구 항미(抗美)동에 대사관이 있었다.
대사관 3층 방에 배속되어 짐을 놓자마자 베이징대 동창인 친구를 만났고 그날 밤은 이 친구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밤을 새웠다.
대사관 큰 뜰에는 정면을 향해 4층 본 건물이 있고 1·2층은 판공실(사무실), 3·4층은 공관원 숙소 및 거주 공간, 북쪽의 부속 건물은 큰 연회장 하나가 있고 통로로 본관과 연결되어 있다.
서쪽에는 작지 않은 수영장이 있으며 뜰 뒤쪽에는 크지 않은 동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했다.
이 대사관은 1958년 중국 지원군이 철수하기 전에 서둘러 지은 건물들로 외부손님들은 다른 문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있었다.
김일성 수상이 거처하던 수상부 뒷면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제외하고는 지리적으로 유리하고 큰 공관이었다.
<※ 참고로 베이징에 있는 북한 대사관은 중국 외교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건국문외 일단공원로(建國門外 日壇公園路)’ 11호에 있다.
미국, 일본 대사관 등이 모여 있는 외교가에 있고 부근 소련대사관과 같은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집무동 외에 수영장과 앞마당에 세워진 김일성 기념탑과의 사이에 숙박 동이 있어 호텔겸용으로 공관원들이 살고 있으며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요 인사들이 투숙한다. 편집자 주석>
나에게는 대사관의 문서 번역과 통역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뭐든지 처음으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이 때 중국과 북한은 매우 긴밀한 사이여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중요 인사들이 많았는데 마침 류샤오치(劉少奇) 주석이 방문한 직후였다.
공관원들의 외부 활동도 빈번했으며 나는 외빈접대 등 의전업무도 맡게 되었다.
일이 많아 과외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당연한 일로 치부하였다.
당시 공관장은 오랫동안 공산당 활동을 한 하오더칭 대사였다.
그는 1907년생으로 일찍이 20대에 공산당에 가입, 지하활동을 한 베테랑으로 인민정부수립 후에는 충칭(重慶)시 당위원장과 시장을 지냈고, 산감녕(산시성, 감숙성 및 녕하지구 일보) 편집장을 지냈으며 외교부에서는 헝가리 주재대사도 지낸 분이었다.
1961년 7월 김일성이 베이징에서 중조우호협력호조조약을 체결할 때 마오쩌둥 주석 및 저우언라이 총리와 같은 자리에 배석했다.
그 후 조선노동당의 최용건(崔庸健) 등 주요 인사들과 중국 국가 주석의 양국 방문 때 일을 잘 처리 하여 중앙의 신임을 받았던 분이었다. <계속>

▲ 박 실 초역 / 전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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