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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전선 월남으로!
이규웅(해병 147, 부 44기)

■ 1967년, 전쟁을 마주하다
1967년 어느 봄날 조국과 민족의 명예를 양 어깨에 걸머지고 자유우방국 월남 국민들을 돕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나는 포항 감포 해안방어 근무 중 파월되어 1967년 4월 16일 기지사령부 내 특수월남 교육단에 입교하였다.
고된 훈련 2주가 지나 3주 째 마지막 날 오후 2시 쯤 야외 훈련장에 갑자기 ‘꽝’ 소리가 나고 모두가 엎드렸다.
내 어깨 위로 무엇인가 떨어졌다. 죽은 채로 공중 분해된 시체의 다리였다.
교육 받던 동료가 철모를 깔고 앉아 81미리 박격포 불발탄을 건드려 사고가 난 것이었다. 전쟁을 마주한 나의 현실이 암울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3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1967년 5월 6일 새벽 4시 총 기상 소리와 함께 연병장에 집합하여 마지막 인원점검을 받고 세부 지시를 받았다.
막상 고국을 떠날 생각을 하니 긴장감과 압박감이 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GMC에 오르고 군가를 부르며 정들었던 부대 문을 빠져나갔다.

■ “대한 해병대 귀신 잡는 그 기백…”
군가 소리가 높아지고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댔다.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영영 보지 못하겠지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포항역에서는 파월장병의 가족들이 환송을 나와 있었다. “여보!”, “경일 씨!” “김 하사님!” 애처로운 소리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연예대의 애국가 연주와 환송 가족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대한 해병대 귀신 잡는 그 기백…” 열차 내에서도 군가는 끊이지 않고 합창되었고 부산 3부두에 도착했다.
우리가 승선한 군함은 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져 갔다. 나는 끝없는 수평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고 온 조국의 번영과 가야 할 월남전선의 평화를 기도했다. 현기증과 뱃멀미가 잇달아 일어나 고생을 했다.
얼마나 갔을까. 중국어 방송만 들리던 라디오에서 갑자기 아리랑 민요가 흘러나왔다. 장병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합창을 시작했다. 그 방송은 월남의 한국방송이었다.
우리는 소매를 걷어도 가시지 않는 더위와 마주했다. 월남의 기후와 생활이 염려스러웠다.
흠뻑 젖은 상의를 벗고 갑판으로 나와 울부짖는 남지나해를 보았다. 험하기로 유명하다는 남지나해를 군함은 잘도 지나가고 있었다.

■ 전쟁의 도시 ‘다낭’
멀리 수평선 저쪽 안개 속에서 이역의 전선이 보였다. 열대 숲도 아득히 보였다.
상갑판 위에 나온 장병들의 환호성이 선체를 뒤흔들었다. 군함이 다낭항에 정박했다.
이곳 월남을 돕기 위해 자유십자군 청룡부대 일원으로 항해해온 나 자신이 스스로도 영웅처럼 느껴졌다.
부산항에서 함께 이곳까지 온 맹호, 백마, 비둘기부대 장병들과 헤어져 각각 다른 LCM(상륙정)에 올라탔다.
우리는 다낭항 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갑자기 ‘꽝’하는 폭음도 들였다. 어디에 쏘았는지 어디로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평화롭게 보이던 이 다낭이 전쟁의 도시임을 알려주었다.
함선, 수송선, 병원선, 고기잡이배들과 하늘을 덮은 헬리콥터들…. 이것이 우리와 월남의 첫인사였다.
우리는 추라이 비행장에 내렸다. 폭격기들의 이착륙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전상자들이 헬리콥터에서 내려지기가 무섭게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청룡여단 본부까지 우리를 경비해 줄 여단본부 청룡경비대 해병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방탄복에 찢어진 얼룩무늬 작업복을 입고 있었으며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에다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있었다. 머지않아 나도 저런 모습으로 변하겠지.
이것이 아직도 생생한 월남전으로 떠나던 순간의 파병의 기억이다.

이규웅 전우의 훈장이 전시된 액자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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