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천 사령관

■ 운명적인 해방병단 입대
강기천(92) 제7대 해병대 사령관은 살아있는 해병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해군으로 입대해 최초의 4성 장군으로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전설 같은 인물이다. 그는 해방 직후 해군의 모체(母體)였던 해방병단(海防兵團) 창설에 참여해 해군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해방병단은 일제(日帝) 강점기에 일본 해군의 주둔지였던 진해 기지에서 출발했다.
청년 강기천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한 친구에게서 해방병단의 장교후보를 모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목포에 있던 모병 사무실로 찾아갔다. 고향이 전남 영암인 그는 마침 진지하게 진로를 모색 중이던 때라 해방병단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22년 전 고희(古稀) 기념으로 낸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해방 직전 일본 해군에 차출되어 본토의 해군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다. 면접과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모병관의 적극 권유로 그는 우리 해군의 초석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군문(軍門)에 들어가게 된 그는 군번 80082를 부여받은 뒤 23년간 해군 및 해병대에 젊음과 정열을 바치며 헌신했다.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해군으로 개칭됐다. 입대 7개월 만에 소위로 임관한 강기천의 첫 보직은 신병교육대 소대장이었다. 신병들에게 가르친 과목은 거의 일본식 그대로였고, 훈련용 무기도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은 소총들이 거의 전부였다.

■ 안보수호 임무수행
1946년 6월에 공포된 미(美) 군정청 법령에 의해 미군 해안경비대 고문관 16명이 파견되면서 비로소 신병 교육훈련이 본격화 됐다. 미군 측은 신병들을 실습선에 태워 진해~목포 구간을 왕래하면서 항해술 등을 가르쳤다.
1948년 그는 대위로 승진하자마자 이틀 뒤 제주도 4·3사태를 맞았다. 남로당 게릴라 500여 명을 포함해 1,500여 명이 총기와 흉기로 무장,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경찰관서 등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우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총선거와 정부수립을 눈앞에 둔 때였다. 이때 해안경비대는 목포, 부산, 군산, 인천, 진해 기지의 함정들을 동원해 폭동 진압과 군수품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이 혼란한 와중에 두 척의 함정(통천호, 고원호)이 월북하는 사건도 벌어져 남한 사회는 준(準) 전시 상황이 됐다.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좌익세력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정장(艇長) 등 간부들을 사살하고 남은 대원들을 협박해 월북한 사건이다.
당시 군산 기지에서 덕천호 정장을 맡고 있던 강기천은 뜻밖에도 동해안 경비업무를 단독 수행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남로당은 함정 납북을 위해 미인계(美人計)까지 쓴다는 소문도 나돌던 터여서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 신혼여행도 부대 내에서…
그는 1948년 12월 대위로 승진, 해군 신병교육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진해 기지로 떠났다. 그러나 그 뒤에도 6·25남침 전해인 1949년 5월 포항에서 해군사관학교 출신 위관(尉官) 장교 등 좌익들이 영관급 상급자들을 사살한 뒤 함정을 몰고 월북한 사건과 월북미수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강기천은 1949년 7월 말경에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진해 기지를 방문하는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영접하는 의전장교로 선발됐다. 임무는 소나무와 잡목들로 무성한 이 대통령 별장까지의 좁은 산길을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일주일 내에 차도를 닦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수백 명의 신병들을 동원해 밤낮 없이 작업한 끝에 임무를 완수했지만 그때 죽을 고생을 한 대원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위관 시절에 해안 경비와 제주 4·3사태 진압작전, 신병교육 등으로 눈코 틀 새 없었던 강기천은 24세 때인 1949년 9월 24일 드디어 18세의 규수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연애할 시간마저 없어 겨우 중매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계급은 소령. 단 하루도 부대를 떠날 수 없었던 강 소령은 진해 기지 인근의 한 초등학교 강당에서 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진해 통제부사령관이 제공해준 승용차를 타고 진해 시가지와 신병교육대 연병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했다. 부인 추(秋) 여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정식 신혼여행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국회의원 시절에 일본의 아타미 온천에 다녀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북한군의 부산 진격 저지
강기천 장군의 최대 전투 경험으로는 6·25전쟁 중 포항 인근의 기계, 안강전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북한군의 부산 방향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국군 및 유엔군의 북진을 준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15분경, 진해의 해군 신병훈련소(기존 신병교육대 개칭) 내부 논에서 모심기를 하고 있었는데 전령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해군본부에서 긴급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대기 중인 지프를 타고 가 전화를 받았더니 충격적인 남침 소식을 알려주며 비상근무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날 오후 6시경 해군본부는 그를 부산 항만경비대장으로 임명하고, 신병훈련소 병력을 전투부대로 편성해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틀 뒤인 6월 27일 드디어 출동명령을 받고 상륙함(LST)에 올랐다. 그런데 불과 열흘 뒤인 7월 7일에는 다시 해군 육전(陸戰)대장으로 보직이 바뀌어 항만경비병력 전원을 LST에 태우고 포항으로 향했다.
북한군 5사단의 대규모 병력이 영천을 통과해 포항 서쪽의 기계와 안강 지역을 뚫고 경주를 노릴 것이니 육전대(陸戰隊)가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라는 임무였다. 육전대는 지원병력과 경찰특공대를 합쳐 1,000명도 안 되는 소수 병력으로 미국 공군 F-51전폭기 편대의 도움을 받아 7시간에 걸친 야간 격전을 벌였다. 결국 이 지역 최고봉인 구암산 고지를 완전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

■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동생
이 전투로 육전대는 사살 161명, 생포 4명의 전과를 거둔 반면 아군 측은 5명이 중경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특공대를 조직해 구암산 정상에 꽂아놓은 북한 인공기를 공취(攻取)한 중대 지휘관 및 병사들은 특진을 했다. 강기천 육전대장은 1952년 3월 해병대로 전입한 후 뒤늦게 미국 정부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군인의 영예 뒤에는 가족들의 수난도 수없이 많았다. 특히 6·25남침 직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한군에 점령된 호남 지역에서는 경찰관과 군인, 우익계 인사의 가족들은 무자비한 학살을 당해야 했다.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인민재판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5형제 가운데 그와 두 남동생 3형제는 해군에 몸을 담고 있었다. 윗 동생은 해군함정을 타고 원산만 근해에서 경비업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 기뢰로 침몰하는 바람에 순직했다. 그런데 10여 일 후 그 동생의 시신이 청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 차례 비통한 슬픔을 삼켜야 했다고 한다.
강 육전대장은 1950년 8월 신병훈련소장으로 복귀했다가 이듬해 6월 해군 백령도 주둔 부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백령도에서는 미 8군이 자발적인 황해도 청년들로 구성된 무장 의용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레퍼드(leopard, 표범) 부대’로 불렸다. 레퍼드 부대 밑에는 15개의 ‘동키(donkey, 당나귀) 부대’가 있었다.

■ 해병대로 적군과 맞서다
1952년 1월, 7개월간의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 근무를 마치면서 그는 해병대의 요청과 자신의 희망에 따라 해병대로 옮기게 됐다. 사실 그때까지 그의 주요 해군 경력인 신병훈련소장, 육전대장, 백령도 주둔 부대장 등은 해병대 업무에 보다 가까운 점이 있었다. 해병대 첫 보직은 제1전투단 작전참모였다.
해병대 제1전투단은 임진강을 낀 장단지역에 위치했다. 이는 수도 서울 방어에 역점을 둔 군사적 보완책(Mixmaster Plan)의 일환이었다. 이곳에서는 특히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가세한 북한군의 추가 공세로 인해 처절한 백병전 등 치열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구사해 공격 제1진이 무너지면 제2진을 투입하고, 제2진이 격퇴 당하면 제3진을 투입하면서 공세를 폈다. 그 전초진지에 배치돼 있던 해병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많은 부하를 잃은 김용호 소대장은 진지를 사수했으면서도 양측의 시체로 덮인 고지에서 “중대장님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신 부하 대원들을 잃은 죄책감을 죽음으로 속죄합니다”라는 유서를 수첩에 써놓고 권총으로 자결해 전우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 전투의 희생자는 중공군이 확인사살 337명, 추정사살 1750명, 포로 9명이었고 아군 피해는 전사 106명, 부상 86명, 실종 8명이었다.

■ 국가·해병대 발전 위한 삶
휴전회담 중이던 1953년 3월 강기천은 해병대 사령부 인사국장으로 부임했다. 회담을 진행한지 무려 만 2년만인 그해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성립됐다. 휴전 후 육해공 각 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증강 정책에 따라 부대증편에 힘을 쏟았다. 해병대는 제1전투단을 제1여단으로 개편했다가 1년 후에는 다시 제1상륙사단으로 편성했다. 해병대의 주요 임무인 상륙작전 능력을 높이는데 주력한 것이다.
특히 훗날 제6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공정식 등 장교들을 미국 해병학교에 보내 상륙전 교육을 받게 했다. 이렇게 해서 1959년 4월 한미 합동 여단급 상륙훈련에 이어, 그해 10월에는 한국 해병대 최초의 사단급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강기천은 그 후 연대장, 사단 참모장, 사령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등을 역임했다.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요청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및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는 해병대로 돌아가 제1상륙사단장(소장), 해병대 사령관(중장)에 임명된 뒤 196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는 대한석탄공사 총재, 한국 레크리에이션협회 총재, 한국 유스호스텔협회 회장, 제9대 국회의원, 영남화학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강 전 사령관은 인터뷰 내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형님’으로 호칭하며 끈끈한 인간관계였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한 번은 나를 불러 놓고 ‘이제 민정이양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시기에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면서 “그렇게 하시면 저는 가족과 함께 한강에 빠져 죽겠다”고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969년 강기천 사령관의 청룡부대 시찰 모습

김성은(右4) 제4대 해병대사령관 등 해병대 5·16주체들과 함께 한 강기천(右2) 사령관

1969년 1월 해병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右2)이 간부들과 악수하고 있다. 우측이 강기천 사령관

육정수 편집위원(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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