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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한 인생행로, 그 발자취를 보다심상문(해병 173기) 중앙회서울연합회 중구지회장
심상문 회장.

■ 심상문 시골소년, 꿈을 꾸다
대한민국 일번지인 해병대전우회 중앙회서울특별시연합회 중구지회 회장 심상문(해병 173) 노병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교를 나왔다.
심상문 소년이 성장했던 그곳은 한반도 최남단의 낙후된 곳이었기에 항상 도회지에 대한 동경심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저돌적이고 모험심이 강했던 그는 ‘나중에 부모님을 잘 모시려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겠다’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나왔다.
시골소년 심상문이 부산에서 처음 느낀 것은 부두에 정박해있는 외항선에서 수많은 물자들을 하역하는 광경을 보면서 바다와 세계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세계에서 미국이 가장 잘사는 나라니까 그곳으로 가야겠다. 우선 영어를 잘해야겠구나!’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곤 고등학교에 가려고 일하면서 모은 약간의 돈을 털어 영어학원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 영어가 익숙해질 즈음에 학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미리 냈던 수업료를 날리고 실망해 있던 어느 날 영어로 쓰인 교회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기에 외국인 선교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들어가니까 외국인 선교사가 영어로 복음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영어가 익숙해지자 부산 제1부두에 가서 하역 노무자 아저씨에게 “저를 짐 속에 넣어 배에 던져주세요”하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다가 밀항자로 걸려서 기관에 끌려가 되게 얻어맞았다.

■ 해병대에 들어간 사연
심상문 소년은 달리 생각했다.
‘일찍 군대에 갔다 와서 직업전선에 뛰어 들어 돈을 벌어야겠다’ 결심하고 17살 되던 해인 1965년 해병대 지원하여 두 번 만에 합격, 해병 173기로 입대했다.
3개월 신병교육이 끝나는 날, 기차로 수송되어 배에 태우고 내려놓은 곳이 백령도였다.
“거기서 박순태 선배를 만났고, 그 기수(169기)가 4명 있었는데 집합을 당해 ‘빳다’를 맞았는데 169기한테 제일 많이 맞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50년이 넘어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운줄 모르겠어요”하며 “중앙회 홍보특보(박순태)와 지역회장(심상문) 신분으로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한다.
심상문 청년은 제대 후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지만 아무데도 취직이 안됐다.
그래서 “대통령 각하 어찌된 일입니까? 저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해병대여서 그런 것 아닙니까? 등등…” 구구절절 써서 호소문을 올렸지만 “수고했다. 훌륭하다 그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례적인 회신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력 있는 외가 쪽 형께 취직을 부탁했더니 “기다려 봐라”하고는 연락이 안 오는 것이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것이 해병대 아닌가?’ 각오를 굳게 하고 다시 찾아가서 “형님이 저를 취직시켜줄 때까지 집안일 거들며 있겠습니다”고 진상을 부리며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했다.

■ 어느 날 빛이 되어 다가왔다
해병대의 진가를 알아본 그 형님이 어느 날 전매청에 취직을 시켜줘서 거기서 전매청이 없어질 때까지 장기 근속했다.
직장을 잃은 그는 택시사업을 한다고 뛰어 들었다가 모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월세 방을 얻어 신당동 옆 황학동으로 이사 왔다.
그런데 그곳에 부산에 있었던 그 교회가 보이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니 옛날 부산에 있던 그대로였다.
거기서 다시 영어를 배우며 못 다한 공부를 시작해 고졸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방통대 영어영문학과와 법학과를 5년간 다녔다.
자신을 지식인으로 리모델링하는 성실함은 언젠가는 보상을 받는 모양이다.
해병대 출신 심상문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나중에는 아파트지역 주택조합장이 되었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빛이 하나님을 믿는 심상문 성도에게 서서히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교회 감독(목사)이 “내 집을 사세요”라고 말해 하도 기가 막혀 화를 냈다.
“감독님 제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9만 원 사는 거 잘 알면서 누구 놀리십니까?” 하니까 “그냥 되는대로 천천히 갚으세요”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내 집을 갖게 됐다.
그 집의 땅은 한전 것이고 집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낡은 가옥이어서 빈민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처음 갖는 내 집이었다.
입주하여 보니 내 집도 아니고 한전 집도 아닌 골치 아픈 집이었다.
배짱 좋고 성실한 심상문은 주민들을 설득하여 한전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재건축하기로 중지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132가구의 15층 단지가 되었다.
목사가 그 당시 “이 집을 해결할 사람은 심상문 성도 밖에 없습니다”며 집을 넘겨주었던 것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 “감사합니다” 심상문 회장의 독백
심상문 회장은 바르게살기위원장 등 지역의 몇 개 봉사단체를 이끌면서 정당에 가입, 지역사회에서 지도자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2002년 서울 중구 기초의원 출마를 했지만 낙선, 2006년 다시 도전하여 2명 뽑는데 7명이 경합하여 최다 득표 당선자가 되었다.
당시 기호가 ‘2-나’였는데 끝에 ‘-나’ 기호가 당선되기는 처음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초선 심상문 의원은 중구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으로 정치는 딱 한 번만 했다.
그리고 중구해병대전우회 회장으로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저는 모든 일을 해병대정신으로 했습니다. 해병대였기에 해병대정신으로 살았습니다” 하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정신가치를 모두 해병대에게 돌렸다.
중구전우회장을 맡게 된 것도 회원들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밀려 올려졌다고 한다.
어느 날 “중구전우회가 어려운 지금 심 회장 같은 분이 맡아야 한다”고 박영한 회원(현 중구의회 의원)이 말하자 모두 만장일치로 박수치는 바람에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2년간 서울의 중심 중구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중이다.
“중구 내의 일등 모범단체로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말하는 심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침에 눈뜨면 감사합니다. 아내에도 당신이 밥해준 것 먹게 해줘 감사해요. 중구회장 맡은 것도 감사합니다”고 현재를 긍정의 마인드로 살고 있는 중이다.
2002년 낙선 후부터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 모든 일에 감사와 긍정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그 눈빛에서 볼 수 있었다.

야간방범 순찰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심상문(右2) 회장.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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