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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과거 베트남전쟁 참전결과의 대남군사적 함의

북한이,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중인 바, 이와관련 과거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결과 분석을 통해, 대남군사적 함의를 살펴보았음.

Ⅰ. 서론

박 형 식

세종도서『TEN(북한사람정치의식

북한내부체제붕괴)』

저자북한학정치학박사

베트남전쟁은 1960년부터 1975년 4월 30일간 지속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FL)과 연합한 북베트남 대 미국사이에 벌어진 제2차인도차이나전쟁을 지칭한다. 남베트남 내부 반정부세력NFL과 남베트남정부간 내전이 발생중인 상태에서,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 하며, 전쟁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냉전의 대립된 상황에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자유진영은 미국, 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태국이 군대를 파병했고 여타 17개국에서 물자를 지원해 총 23개국이 참전했다. 공산권 국가는 소련,중국, 북한,쿠바를 비롯 동유럽사회주의 진영이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많은 미군사상자가 발생하자 반전여론이 급증하였다. 이후 1968년부터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취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정전협상과정에서 협상주도권을 확보키 위해 대규모의 북폭공습을 강행하여 전장이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하였다.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등 공산권 으로부터 현대화된 신형무기를 대대적으로 공급받아 전면적인 공격으로 1975년 남베트남정권을 완전 붕괴시켰다. 1976년 남북한베트남은 통합되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출범했다.

한편 상기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군이 참전한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비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탈냉전 흐름에 따른 국제적 정세변동으로 인해 상당히 많은 부문들에서 그 어두운 장막들이 드러났다. 북한체제의 베트남전쟁의 참전 규명은 매우 중요한 안보문제중 하나이다. 이는 비록 북한군 참전 규모가 상대적으로 한국군에 비해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준으로 불과 10여년전 한반도에서 6.25동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과 같이, 남북한 대결전장이 베트남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북한독재체제의 베트남전쟁 참전관련 파병 배경과 저의, 파병 부대활동 내용 등을 분석하였다. 최근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중인 가운데, 독재자 김정은의 호전적 대남망발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그 대남 군사적 함의를 분석하였다.

Ⅱ. 본론 :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내용 분석

1.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배경 및 참전저의

가. 참전배경

당시 냉전시대가 격화되는 국제정세에서 베트남전쟁은 단순 내전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공산주의독재체제 국가들간의 진영대결의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자유진영에서는 23개 국가들이, 공산주의체제는 14개 국가들이 지원하거나 참전했다.

북한은 1950년 1월 31일 북베트남과 외교관계를, 한국은 1956년 5월 23일 남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했다. 북베트남 주석 호치민이 1957년 7월 북한을 방문한데 이어 북한 주석 김일성도 1958년 11월 하노이를 답방했다. 당시 김일성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약측간 교류협력친선 강화, 반미공동전선강화를 천명했다. 이를 통해 양측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 남베트남 지엠 대통령 1957년 9월 한국방문. 한국 이승만대통령 1958년 11월 남베트남 답방.

북베트남은 1960년 4월 한국에서 4.19가 발생하자 하노이에서 1만명 참석 군중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국내부 반미반정부투쟁을 선동했다. 북한도 1964년 8월 통킹만사태가 발생하자 평양시군중대회를 개최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윁남인민투쟁지지주간을 설정했다. 이후 과정들은 북한과 베트남이 반제반미공동전선을 더욱 연대해 나가는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북한은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FL, 이후 PRG 즉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로 변경)도 인정했다. 북한은 평양에 북베트남 대사관에 이어, NFL의 대표부도 연이어 개설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서기장 원문호는 1962년 11월 북한을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정권은 내부에 남부윁남인민투쟁 지지위원회를 결성했다. 북한은 평양과 청진 등에 NFL에 대한 게릴라훈련 켐프를 개설하고 군사훈련을 적극 지원했다.

나. 참전저의

북한 김일성은 베트남전파병과 관련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 ----- 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우는 나라 인민을 적극 도와야 한다”강조했다. 이는 반제반미 기치를 내걸고 NFL과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조작한 정치적 슬로건 이었다.

* 국제주의 : “자본주의제도의 전복과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과 연대성의 사상. 배타주의와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세계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 사상”(북한발행 정치용어사전)

북한 김일성은 베트남참전을 통해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결과적 으로 북한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한국군이 파병한 상태에서 이를 수수방관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김일성은 공산진영의 맹주 소련과 중국이 미국과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베트남전 군대파병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이후 베트남 붕괴시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다.

* 김일성, “웥남(베트남)에서 미제 침략군을 한 놈 잡으면 남조선에서 한 놈이 못들어 올 것이고 백 놈 잡으면 백 놈이 못들어 올 것이다. ---우리 비행사들이 웥남에 가서 사상적으로 군사적으로 단련하고 돌아오면 조국통일의 혁명적 대사변을 맞이할 때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다.” (1966.10.19. 북한군 베트남 파병 담화문, 출처 : 김일성전집37권)

당시 미국도 소련 중국과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기 위해 북위 17도 이북의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진격은 자제했다. 단지 공중폭격을 강화해 나가는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북베트남폭격시 동중국해 항공모함 함재기, 태국과 남베트남공군기지의 폭격기 전투기, 괌기지의 B-52전략폭격기를 동원했다. 이런 연유로 북베트남은 공군력에서 절대 열세에 있었다. 북한 참전이 공군조종사와 고사포부대 등을 주축으로 파견된 것도 당시 이런 전황들이 반영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6.25동란당시‘베트남전쟁의 북베트남과 같은 처지의’절대 열세의 공군력을 경험했다. 북한 김일성은 휴전이후 공군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1966년 북한공군은 군인 3만5천명, 항공기 680대를 보유했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은 없는 상태였다. 북한 김일성은 1966년 10월 공군부대를 파병 하면서“미제놈들과 공중전으로 싸워보면 전술을 알수 있다. 윁남에 가서 미제와 싸워 이기는 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북한 김일성은 베트남참전은 ‘국제주의 의무’라는 정치적 선전공세로 위장했다. 실제는 현대전의 경험 축적을 통해, 향후 대남무력침략 전략전술을 연마하려는, 궁극적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김일성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연인원 약 32만명이나 파병된 것과 관련 이를 견재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수십만 한국군이 현대화된 무기로 실전경험을 축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북한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했던 시기에, 수많은 대남도발을 감행했던 것도 이런 이유와 연계된다. 대표적 사례로는 1967년 동해안당포함사건, 1968년 청와대기습 사건과 푸에블로호납치사건과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EC-121기 격추사건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도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의 증파를 더 이상 요청할 수 없었다. 이는 북한 김일성과 북베트남 호치민이 긴밀하게 사전 협의하여 이런 대남군사도발들을 감행했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2.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내용

가. 공병부대

북한체제 김일성은 1966년 10월 북베트남에 파병하는 공군조종사들과 담화에서“윁남 바크보만사건(1964.8 통킹만사건)이 있은 다음 윁남에 갱도를 건설해 주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전투원들이 아닙니다”라고 언급했었다. 이는 북한이 이미 북한군인들을 파병하기 전에 공병부대를 북베트남에 보내, 땅굴 굴설을 지원중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북한은 196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5차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이미 4대군사노선을 진행중에 있었다. 특히 4대군사노선중 ‘전군의 요새화’는 북한전역 전쟁대비 지하시설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는 것으로써 이 과정에서 땅굴군사시설 작업기술에서 상당한 노하우들이 축적되었었다.

북베트남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중인 북한의 땅굴진지 구축기술 경험들이 자신들에게 매우 필요했었다. 북한은 1964년부터 1972년까지 북한공병부대 2개대대급을 파병했다. 북한은 땅굴전문 공병부대파병에 토목기사와 건축기사들도 함께 보냈다. 이들은 북베트남 주요시설 재건과 북폭에 대한 재건활동 등에 투입됐다. 북한은 북베트남에 북베트남 당중앙위와 국방부까지 수용할수 있는 정도의 갱도건설도 지원했다. 구축된 북베트남의 땅굴내부는 부대숙영시설, 작전회의실, 무기탄약고, 환자치료실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당시 북베트남 땅굴은 주민들의 공습시 피난장소 역할과 군인들의 전쟁수행의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이를 통해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공습을 회피하고 기습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는데 있어 땅굴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나. 공군부대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북베트남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미국 지상군 부대는 북위17도 이남지역에서만 전투를 시행했지만 공중폭격은 북베트남 전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 인하여 매우 취약한 공군력을 지녔던 북베트남은 매우 심각한 국면에 있었다. 북베트남의 공군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은 전투기 폭격기 등 전쟁물자들 위주로 지원했다. 추후 소련과 중국은 은밀히 자국 조종사들을 파병했다. 북베트남은 6.25동란에서 미국과 공중전 교전경험이 있었던 북한에게 공군조종사 파병지원을 요청했다.

북한은 6.25동란이후 자신들의 열악한 공군력을 증강시키는데 총력을 경주하여 1960년대 중반에는 상당한 수준의 질적 양적인 공군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북한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대상으로, 북한군실전 경험축적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공군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에서 북한공군을 1966년 11월부터 1973년 1월까지 파병했다. 북한 공군병력은 1개 비행연대(조종사 60명, 지원병력 40명) 규모로써, 파병기간 총 연인원은 약 1천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북한 공군 조종사들은 소련이 북베트남에 지원한 전투기(MiG기)를 조종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초기에는 MiG-17조종사들을, 그리고 1970년 이후에는 MiG-21조종사들을 파병했다. 북한군 조종사들은 3개 비행전투중대로 편성되었으며 1개중대당 10대의 전투기가 배정되어 총 30대(MiG-17 2개중대, MiG-21 1개중대)를 조종 했다. 북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조종사들을 6개월 단위 기준으로 교체되어 보다 많은 조종사들이 실전 전투경험을 공유토록 획책했다.

다. 고사포부대

베트남전쟁 초기에 북베트남은 미군의 공습에 대해 전역이 노출된 상태에 있었다. 효율적인 방공망도 구축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호치민은 소련에 대해 대공방어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1965년초부터 다량의 소련제 고사포 등이 북베트남에 반입되었다. 중국도 북베트남에 대공무기지원과 방공부대도 파견했으며 베트남 접경지역에 미군 공중공격에 대비한 자체 대공방어체계도 구축했다. 북베트남은 1968년 소련으로부터 현대화된 대공방어무기시스템 구축에 대대적인 지원도 받았다. 북베트남은 이를 통해 지대공미사일기지(SAM), 전자방어시스템, 방공포, 자동대응무기 등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결과 북베트남에 대한 미공군 폭격은 상당한 정도의 제한을 받았으며, 이후 다수의 미군 B-52 전략폭격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북베트남은 북한의 6.25동란 당시 북한이 미공군에 대항했던 전투경험을 필요로 했다. 북한 역시 당시 북한 전체가 미공군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동란 기간중 북한 대공포에 의해 미군의 비행기들이 격추되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은 6.25동란 정전 이후 이런 뼈아픈 경험을 참고하여 반항공대책위원회를 북한의 전역에 조직하고 훈련을 강화토록했었다. 북한은 북베트남에 소련과 중국이 지원한 대공방어시스템과 대공미사일장비들 운용기술과 교육훈련도 지원했다. 북한은 고사포부대의 파견을 통해 미공군과 실전을 통한 대공전투경험을 축적했다. 이후 북한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공군전투기법을 연구해 평양대공방어시스템 구축에 활용했다.

라. 심리전부대

한국군은 베트남전쟁 파병 당시 남부베트남 주민들과 베트콩들을 분리하기 위한 대민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민사심리처를 설치하고 예하부대들에 참모부도 편성했다. 주월한국군은 남베트남 주민들 대상 농경지원, 구호사업, 자조사업, 대민건설, 진료지원, 문화교류, 무술교육, 한국어교육 등을 진행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이런 한국군의 활동들에 대응하기 위하여,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북한에게, 심리전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북한은 1966년부터 1972년간 베트남전쟁에 심리전 부대를 파병했다. 당시 총 연인원은 1백여명으로 추산되었다. 북한 심리전부대는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까지 진출해 한국군 대상 심리전작전을 전개했다. 북한의 심리전부대는 한국군에 대해 염전사상전파, 북한체제찬양선전, 한국어심리전라디오방송, 유격전술연구, 선전출판인쇄배포, 국군납치조운영, 군사작전첩보수집, 국군내부침투공작, 정치투쟁조직공작, 군대활동문건수집, 기층간부양성, 무전 도청해독, 게릴라전투경험습득 등을 시행했다. 그리고 베트콩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태권도교육도 병행했다.

* 한국군도 북한군심리전에 적극 대응해 첩보수집보안활동강화, 북한군생포, 북한공작원조직와해, 개별활동금지, 주월한국군방송국(KFVN, 1966~1973년간 운영) 등 실행

마. 특수전부대

북한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전쟁에 특수전부대도 파병했다. 북한은 초기에 자원병 형태로 2천명 정도를 파병했었다. 이는 북한이 한국군에 대응토록 동일한 지상군도 파병했음을 방증한다. 이후 1970년대 들어 이들 대신 정규군 2개 대대병력으로 대체했다. 북한이 베트남에 파병한 특수전 부대는 경보병부대였다.

북한군 경보병대대는 대대지휘부, 통신소대, 6개의 경보병중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인원은 군관 36명, 하전사 등 총 426명이었다. 즉 2개 대대는 기타지원인력 등을 포함 약 1천명여명 규모이다. 특수전부대 임무는 전선후방에 침투해 적지휘부와 통신수단파괴, 군사시설습격제거, 병참선차단 등을 통한 후방지역교란으로 제2전선을 형성하는 데 있다.

북한 특수전부대는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체결 이후에도 주둔하였으며 특히 1975년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무력침공시 이들 특수전부대가 북베트남 무력침략을 적극 지원했다. 이어 공산화통일 이후에도 연락장교 군사자문단 등 북한군 병력 5백여명이 잔류했었다.

바. 훈련지원

북한체제는 베트남전쟁 전후 이미 다국적 게릴라들과 테러리스트들을 대상으로 폭력혁명수출기지 역할을 진행중에 있었다. 북한 내부의 교육장소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경성비행군관학교, 김철주포병군관학교, 강건종합군관학교 등이었다. 교육기간은 6개월~18개월 훈련이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이 해외에 파견하여 교육시켰던 인원은 9개국에 약200여명, 그리고 방북시켜서 훈련시킨 인원은 33개국에 3천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1965년부터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국 주관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장교들을 북한으로 초대하여 게릴라전 고급과정을 이수토록 하였다. 당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은 북베트남 무장세력 장교들과 남부베트콩의 장교들도 북한에 끌어들여, 20여개 특별초대소에 각 40명씩 수용, 실전과 같은 게릴라전술교육을 진행했다. 이들은 중국을 통해 입북했으며 평양, 청진, 해주등 훈련시설에서 3개월간 교육받았다. 북한은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연인원 약 1천여명을 교육시켰다. 북한체제는 기본게릴라전법 교육은 북한교관들을 직접 베트남 현지에 파병하여 훈련시켰다.

사. 군수지원

북한과 베트남은 1950년 수교후 ‘경제 및 군사에 대한 무상원조협정 등을 체결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총기 10만정, 탄약, 군복 1백만벌, 식료품, 의약품 등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북한은 베트남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북베트남에 4천 2백만 루불을 무상지원했다. 당시 북한도 소련, 중국, 사회주의 진영으로 부터 무상원조와 차관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북한도 1970년에만 9천만 달러의 무상원조와 차관을 받았었다. 베트남을 무상원조 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북한체제의 이런 무리한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추후 북한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Ⅲ. 결론 :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결과의 대남군사적 함의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당시 냉전시대 진영외교의 국제적 정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실질적인 참전 이유는 한국군 32만명이 베트남전쟁이라는 전장에서 실전전투경험이 축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있었다.

북한 김일성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추후 대남도발에 필요한 미군과 한국군과 같은 실전 전투경험 축적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에서 취득한 한국군과 미군의 전술연구를 참고 북한군의 전술변화를 촉진시켰다.

북한공군은 매복전, 기습전, 사냥전, 교란전으로 구성된 공군유격전술을 개발해 훈련시켰다.

이는 북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공군조종사들의 미공군 전투기 전폭기들과 실전 공중전투 경험을 토대로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북한식 공중전술이었다. 
* 김일성, “이번에 또 다시 전쟁이 붙게 될 경우 이번에는 제공권을 장악해야 합니다.

6.25때에 우리가 제공권을 빼앗겨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까? 그래서 그동안 우리는 공군력을 증강하는데 많은 힘을 집중했습니다.

우리가 월남전에 공군을 지원했던 것도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윁남전에서 소련, 중국 그리고 우리 비행대가 교대로 하노이 상공을 지켰는데 우리 비행대 가 지킬때에는 미국놈들 비행기가 하노이에 못들어 왔다 합니다.

그만큼 미국놈들도 우리를 무서워합니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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