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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도하와 파로호
파호로 전적비

■ 6·25전쟁 시 쟁탈전 벌어진 화천발전소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산과 산 사이 계곡을 통해 낮은 곳으로 흘러서 강원 양구군 양구읍을 거쳐 화천군 간동면에 이른다.
1939년 2월부터 간동면 구만리 북한강 협곡을 막아 동서 435m의 다목적댐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인공 저수지의 유역 면적은 38.9㎢로 저수량은 무려 1억 톤이나 되었다.
그런 후 1944년 5월부터 10월까지 댐 높이 77.5m의 낙차를 이용하여 출력 54,000K(현재는 108,000KW)의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화천발전소는 전력을 생산 공급하는 매우 중요한 시설일뿐 아니라 댐에 16개의 수문을 설치하여 홍수를 조절함은 물론 여러 분야에 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원래 38선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피아간에 이 중요한 발전 시설을 놓고 심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951년 4월 초 중공군 제115사단은 북한강을 따라 화천 저수지 수문 일대에 연대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에 임하는 한편 국군이나 유엔군이 저수지 확보를 위한 도하 작전에 대비 북한강 일대에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럴 때인 4월 10일 해병 제1연대는 화천군 하남면 위라리에서 동편에 흐르는 북한강을 도하하여 동북편에 위치한 화천 저수지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러자면 도하 작전에 필요한 강의 수심, 강폭, 유속 등을 측정하여야만 했다.
그래서 헤엄을 잘 치는 제주도 출신을 선발하여 도강을 해보도록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선발된 것이 제1중대 소속인 해병 3기 김춘영 수병(북제주군 구좌읍 행원리), 해병 3기 부순영 수병(북제주군 한림면 대림리), 해병 4기 정석훈 수병(남제주군 남원면 신례리)이었다.

■ 제주도 출신 해병, 도하 작전 개시
이 용사들은 온 산하가 고요하게 정적이 깃든 4월 11일 밤 11시에 M2카반소총의 총구를 막아 거꾸로 대각선으로 메고 수류탄 2발을 모자 속에 넣어 끈으로 모자와 턱을 단단히 묶었다.
그런 후 중대장 이서근 중위의 성공을 빈다는 격려를 듣고 김춘영·부순영·정석훈 수병 순으로 강물에 들어가 천천히 몸을 물에 담그고 수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4월이지만 강물은 겨울 때나 진배없이 차가웠고 물살은 급하게 하류로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악조건이라 부 수병은 도중에 포기하여 돌아와버리고 정 수병은 강동쪽을 향해 힘차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런 데 강 중간까지 왔던 김 수병이 “석훈아! 나 살 려주라!” 하면서 무작정 하류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촌각을 다투는 시점이라 정 수병은 급히 하류로 헤엄쳐 김 수병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김 수병은 저체온으로 전신의 마비가 되어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정 수병은 김 수병을 강 서안으로 거세게 밀기 시작했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 수병은 혼신의 힘을 다 내어 김 수병을 계속 밀고 하류로 100m 이상 떠내려가서 강 서안에 도달하니 기진맥진하였다.
그때 전우들이 급히 달려와 김 수병을 끌어올렸으나 숨을 제대로 쉬지 않고 인사불성이었다.
전우들이 김 수병을 인근에 쳐 놓은 천막으로 옮겨 불을 살라 몸을 녹이게 하였다.
그렇게 불 곁에서 30여 분을 경과하니 따뜻한 기운이 몸을 녹였던지 코와 입에서 거품을 내뿜더니 가까스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전우들이 “살았다” 하고 모두 기뻐하였고, 차차 수족도 마비에서 풀어지기 시작하여 김 수병은 소생하였다.

■ “적 초소를 폭파시켜라!”
정 수병이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김 수병은 북한강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나 아직은 명이 남아 있었던지 천만다행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 결과를 보며 북한강을 그대로 건널 수 없다고 판단하여 미 해병대의 고무보트를 타고 도강하여 화천저수지의 중공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막상 해병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화천저수지 부근에 이르렀으나 중공군은 댐이 좌우측에 포격에도 견딜수 있는 견고한 진지를 만들고 엄중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이 댐의 통로를 따라 진격하려면 적은 단단한 방벽을 치고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어 정면 돌파는 아군이 많은 피해를 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 수류탄을 지참하고 밤중에 몰래 저수지를 헤엄쳐가서 적의 좌측 초소를 폭파시켜 댐을 장악하기로 했다.
그 임무는 해병 제2대대 제7중대가 맡게 되었고 소대장 추천으로 남제주군 대정면 가파리 출신 해병 제3기 강순백 수병 등 수영을 잘하는 건장한 병사들이 선임되었다.
이윽고 중대장 박정모 중위는 차출된 병사 3인을 중대장 천막으로 호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강 수병 등이 중대장을 찾아가니 따뜻이 맞이하여 앉으라고 하더니 귀한 양주와 닭고기를 내놓으며 마시라고 권했다.
이전에 없던 친절에 강 수병 등은 어리둥절하였으나 권유에 못 이겨 양주 2잔씩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그제야 중대장은 비로소 임무를 부여하며 퍽 미안한 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자 강 수병 등은 위계질서가 확립된 군조직이므로 거부를 못 하고 마지못해 수락을 하였다.

■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 파로호
그런 후 중대장실을 나온 3인은 이 저수지에 익사하든가 사상을 당할 우려가 있어 자포자기하며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강 수병 등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중공군 제1차 춘계대공세로 작전이 취소됨과 동시에 해병대는 철수를 하게 되어 살아나게 되었다.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중공군은 25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으로 제1차 춘계공세를 4월 22일 개시하여 중서부전선 에도 파도처럼 밀려들자 해병대는 중과부적으로 화천에서 철수하여야 했다.
이어서 중공군은 제1차 춘계공세(1951.4.22.~4.30.)와 제2차 춘계공세(1951.5.15.~5.20.) 등 두 차례나 전력투구하여 공격을 해보았으나 우세한 병력만으로는 유엔군의 현대무기와 장비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병참 지원이 후속되지 않아 공산군은 5월 23일을 기해 연천-삭령-양구의 원통을 잇는 선 북쪽으로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러자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이 노도같이 진군하여 구만리와 병풍산을 잇는 캔자스 라인(Kansas Line)으로 진출하였다.
그러자 중공군은 배후는 화천저수지이고, 남쪽은 국군이 몰아치니 불가피 저수지로 들어가 헤엄치다가 익사 또는 포로가 되거나 아군의 포연탄우 속에 25,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이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 하여 화천저수지를 파로(破虜)호라 명명하였고, 1975년 11월 26일 화천군 주관으로 ‘파로호전적비’를 세웠다. 

▲ 정수현(부 4기)

해병대전우회 제주연합회 자문위원

작가·제주수필문학회장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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