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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기생을 통해 본 최강 해병대 탄생 Story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북한 미사일이 지속적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5천만 국민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현재 연평도 백령도 등 서북도서 최전방을 지키는 우리의 믿음직스러운 해병대는 죽음을 불사하고 임전태세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후퇴’라는 단어가 없다. 해병대가 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해병대가 강군인가를  해병대 창설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보자.

■ 해병 1기 300명으로 시작된 해병대 역사
해병대의 초석인 해병 1기생들은 1949년 5백 명의 해군 13기생들 중에서 선발, 훈련시킬 방침이었다.
따라서 참모장 김성은 중령은 안창관, 김낙선 소위와 강복구 중사 등 3명에게 “한가락씩 할 만한 똘똘하고 주먹 쎈 놈들을 뽑아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안 소위는 눈에 광채가 나는 똘똘한 자를, 그리고 김 소위와 강 중사는 힘깨나 쓸 만한 믿음직하고 주먹이 큰 자들을 뽑겠다고 행동 개시한 것이 강군 태동의 시작이었다.

■ 미 해병대의 모병 비화와 이심전심
그들은 미 해병대의 창군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1775년 미 해병대 창설 당시 최초 모병 활동을 주막집 주인 출신인 멀렌 중대장이 이끄는 공작대를 각처로 보내 북을 치며 모병을 하게 하되 천하에 악명 높은 깡패나 왈가닥 패거리를 설득, 포섭하여 그들에게 철저한 정신교육을 주입하고 강한 훈련을 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전통에 빛나는 역사 오랜 미 해병대의 영광스런 주춧돌이 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해병대도 미 해병대와 이심전심으로 한가락 할 만한 똘똘한 자들을 뽑아 강인한 해병대의 초석으로 만들고자 일맥상통했다.

■ 해병대 기합의 대명사, 강복구
강복구 중사는 작달막한 키에 검은 색 안경을 쓰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반장군화를 신고 빳빳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은 기합 든 자세로 1,000여 명의 가입대자들 앞에 나타났다.
무영 옷을 걸치고 있던 가입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그 모습에 놀란 표정으로 뚫어지게 강복구 중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병대 기합의 대명사로 알려진 강 중사는 절도 있고 야무진 목소리로 “해병대란 적진 상륙을 감행할 경우 100명 중 99명의 희생자가 날 수도 있다”면서 “해병대는 중졸 이상 학력 소유자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나이답게 목숨을 던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생전 처음 듣는 무시무시한 말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져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서로 얼굴을 돌리며 눈치들을 살피더니 귓속말로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한 강 중사는 “광장에 집합하라”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광장에는 고무적인 현상이 물결쳤다.
칠백여 명의 해병대 지원자들이 결의에 찬 표정들이었다.
강 중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중 해병 1기 정원 300명을 뽑기 위해 나머지 400명을 잘라내는데 더 고심을 했다.
안창관, 김낙천 소위는 10일 후에 구두시험에서 “어떤 혹독한 훈련도 감당해낼 수 있겠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나?”, “용감히 싸우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 하는 식의 질문을 통해 답변 태도나 내용에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진 자는 탈락시키고 정예 300명 해병 1기생을 선발했다.
마지막 구술시험 과정을 통해 탈락된 자들 중에는 자신의 어디가 어때서 탈락을 시켰느냐면서 강짜를 부리며 항의하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한편, 최종 선발이 확정된 1기생 요원들은 해병대 발상지 덕산(德山)으로 이동하여 정식 입대까지 약 10일간 내무생활과 구보 등 예비교육을 받았다.
같은 내무실에 있던 해군 가입대자들은 “얘! 쟤들 좀 봐, 쟤들 정말 눈에 띄게 달라졌는걸!” 하며 놀라워하며 해병대 조교들을 찾아와 “나도 해병대로 데려가 주십시오“며 통사정을 하는 자가 많아 조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 기마전과 북해도 곰잡이
해병 1기생들 훈련은 4월 1일 입대식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훈련은 3개 중대에 각 중대당 4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각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들은 일본군 출신의 쟁쟁한 멤버들로 호랑이 같은 기질의 소유자들이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 천하무적 해병대 탄생의 조짐이 보이는 대목이다.
입대식이 끝난 직후 훈련병들의 단합심을 위해 펼쳐진 기마전은 싸워서 꼭 이겨야 한다는 감투정신이 가득했다.
팬티 하나만 걸쳐 입고 실시한 중대 대항 기마전은 스파르타식 강훈련의 시작이었듯이 해병 1기생들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모진 추억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약 기마전에서 패하게 될 경우 고통스러운 기합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생결단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마전 이외의 강훈으로서는 철두철미한 제식 교련과 비행장 내의 산(43고지)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면서 각개 전투와 총검술 훈련 등을 손꼽을 수 있겠지만, 특히 이색적인 것은 ‘북해도 곰잡이’ 훈련이었다. 
혹서를 비롯한 역경을 극복해낼 수 있는 인내력을 기르기 위해 실시한 이 훈련은 옷을 많이 껴입은 것이 마치 북해도 곰잡이들의 행색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는데 훈련병들에게 무한한 고통을 강요했다.

■ “해병대 1개 소대 뒤가 가장 안전하다” 강인한 해병대 탄생 
그들은 각자의 관품 상자 속에 있는 모든 옷, 그러니까 여름옷 겨울옷 할 것 없이 있는 대로 다 껴입어야만 했으니 거동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지만, 6~7월 복더위 속엔 차라리 한증막 속에 하루 종일 있게 해주십사는 고통이 따랐다.
그런 차림에다 ‘앞의 총’ 자세로 약 1km 가까이 떨어진 곳까지 구보 왕복을 하였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해병 1기 선배들은 무적해병을 창조하기 위한 용트림을 했고 그 역사는 6‧25전쟁을 통해 김성은 부대장이 이끈 통영상륙작전과 월남전 짜빈동전투 등 해병대 주요작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 신화를 창조한 해병,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등 ROKMC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신동설 발행인】
출처 : 정채호 저 ‘덕산에서 월남까지’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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