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특집
無敵海兵의 함성은 지축(地軸)을 흔들었다해병대사관32기 임관58주년 기념특집
해병대사관 32기 소위 임관 기념사진(1963.6.1.)

올해 임관 58주년을 맞은 해병대사관 32기 동기생들은 해병대 장교로서 일평생 명예와 전통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현역 시에는 조국을 위해 강인한 해병대정신으로 장교 임무를 수행했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해 해병대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는 것은 물론, 국가 경제 발전의 초석에 이바지했다.
또한 전역 후에는 사회 각계에서 주요 요직으로 활동,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해병대史는 물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굵직한 한 획을 그은 해병대사관 32기 동기생들.
그 역사의 출발은 1963년 3월 12일 시작됐다.

해병대사관 32기 입교식.

■ 해병대장교 관문은 바늘구멍이었다
1960년대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병역의무 기피 또는 연장 등으로 병역의무를 소홀히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으로 병역의무 미필자를 공직에서 퇴출시켰고, 심지어 경찰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 학사경찰을 많이 채용했으나 병역미필자는 전부 퇴직시켰다.
이러한 추세로 제32기 해병대사관후보생 모집 광고에 입대자가 많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서울에는 국립대인 서울대, 그리고 사립대는 연·고대를 비롯하여 십여 개 대학뿐이었다.
지방의 각 도청소재지에 국립대 한 군데가 고작이었고, 사립대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도권의 대학에서 많이 합격했으며, 지방대 출신은 극소수가 합격했다.
영광스럽게 합격통지서를 받은 자는 제멋대로 텁수룩한 장발 머리에 평상복을 입고, 1963년 3월 10일 진해 해병학교에 가입교해서 정밀 종합 신체검사를 받아 합격해야만 했다.
그래서 가입교자 189명 중 24명(12%)이 불합격했고 165명이 합격했다.
불합격자는 눈물을 머금고 허탈하게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해병대장교가 되기 위한 관문이 너무 좁아 가입교 때 붙어 통과하기 어려웠다.

해병학교 32기생들이 천자봉을 등정했다(1963.4.15.)

■ 혹독한 인간개조의 담금질
해병대사관 32기 후보생 165명은 두발을 스님처럼 빡빡 깎고, 약정복으로 갈아입고 1963년 3월 12일에 사령관이 임석한 가운데 입교식을 마쳤다.
병사에 돌아와 훈련복(작업복)에 장군화를 신고, 빨간 명찰 및 구멍 뚫린 다이아몬드 계급장을 부착한 후 팔각모를 쓰고 3개 병사(막사)에서 내무 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사의 내부 문지방 위에 ‘人間改造(인간개조)’라는 큰 액자가 붙어 있었다. ‘인간을 어떻게 개조할 수 있는가!’ 몹시 의아스럽게 했다.
서슬이 퍼런 1구대장 이근호, 2구대장 강신무, 3구대장 지순하(교대 방기호)의 온갖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귀관들, 눈동자 똑바로 해! 가슴을 확 펴! 똘래거리지마! 사투리 고쳐! 오형 다리 똑바로 펴! 귀관들의 비곗살을 빼서 뼛속으로 살찌게 해 주겠어!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소크라테스가 낫다! 해병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야! 안 되면 될 때까지야!” 등 생소한 언어로 공포감을 주어 후보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인간 개조는 “병사 떠나 15분 전!”, “5분 전!”, “병사 떠나!”의 3단계 구령에 의해 선착순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선착순은 병사 떠날 때 특히 야간 특별훈련으로 비무장, 단독무장, 완전무장 그리고 팬티 바람, 내의 바람에 철모만 쓰고, 장군화 신고 내의 바람, 내의 바람에 단독무장, 오른발에 장군화 왼발에 훈련화 등 각양각색의 해괴한 복장을 하고 선착순으로 집합하면 후미 10명은 야구방망이로 인정사정없이 궁둥이를 때렸다.
그래서 선착순 구령만 떨어지면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못차렸다.
내무 생활의 저녁 순검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순검 준비에서 관품 정돈, 군화 손질, 병기 손질 등 불량자로 지적되면 범칙보고서를 제출했다.
여러 번의 범칙 보고는 퇴교 심사에 반영되었다.
연병장에서 무거운 M1소총을 들은 제식훈련, 포복훈련, 총검술훈련으로 구슬땀을 흘렸고 입에서 쓴 내, 단내가 나는 악전고투였다.
특히 교육기지 3정문 전봇대 돌아오기를 매번 반복하여 후미에 도착한 몇 명은 ‘빳다’의 세례였다.
야간 특별훈련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또한 힘든 훈련은 단독무장 및 완전 무장이었으며 해병학교 및 상남 훈련연대에서 주로 토요일에 실시되었다.
구대장은 고함쳤다. “해병대는 한 명이라도 낙오자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낙오자가 발생하면 낙오자 소총과 철모를 옆 후보생이 들고 양팔을 두 후보생이 부추기며 뛰어야 했고, 모두가 그로기(gloggy) 상태에 빠질 때가 많았다.
또한 3월 말 상남 용지못에 단독무장으로 들어가는 냉한 훈련이 있었다.
당시 M1 소총을 높이 들고 목에까지 잠기도록 들어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약 30분 간의 고통이 지금도 몸에 엄습해오는 것 같다.

완전무장 장거리 행군 후 충무공에게 신고(1963.)

■ 해병대 용광로 지나 감격스런 임관으로…
천자봉 구보를 빼놓을 수가 없다. 천자봉 정상에 4회 올라갔는데, 완전무장 선착순으로 올라갔다가 선착순으로 학교 연병장에 도착하여 후미에서 잘라 퇴교를 시켰다.
임관을 앞두고 완전무장 장거리 행군을 했는데 마산을 경유, 6·25전쟁 당시 진동리 격전지, 통영(충무)의 김성은부대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한 상륙작전의 현장, 통영 세병관(洗兵館)을 거쳐 해군 수송선으로 이동, 한산도에 상륙하여 이순신 장군에게 엄숙하게 신고식을 가졌다.
한산도에서 야전 천막을 치고 1박 한 후 역순의 경로에 의해 해병학교로 돌아왔다.
해병대 용광로인 해병학교에서 12주간의 정상적인 커리큘럼에 의한 전반적인 교육을 철저히 이수했다.
그리고 각종 특별훈으로 단련되어 타군이 추종할 수 없는 해병대장교의 본질인 적성·자질·인격·품위·정신력 등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부적격자는 가차 없이 퇴교시켰다. 그래서 165명이 입교하여 56명이 퇴교(34%)되었고, 129명이 늠름한 자세로 백색 정복을 입고 감격에 넘치는 임관식을 가졌다.
그간 해병학교는 무적의 해병대장교를 육성하는 용광로였고, 중대장 및 구대장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대장간에서 연철을 두들기고 때려서 담금질을 많이 해서 좋은 연장을 만들듯이 우리 32기에 담금질을 많이 해주어 감사했다.
심지어 정복을 입고 임관식장에 가기 전에 “임관을 축하한다”며 ‘기념 빳다’ 한 대를 살그머니 때렸다.
이때 큰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답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 기초반(초군반) 6개월간의 연단
그간 12주간의 훈련 과정을 되돌아보면 악몽과 같았지만, 임관식을 마친 32기생들은 10일간 휴가를 얻었다.
의젓하게 백색 정복을 입고 양어깨에 은색 다이아몬드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백색 정모를 썼다.
임관식에 참석했던 부모 또는 애인들(신기택 1명만 결혼)과 함께 버스 3대에 분승하여 진해역으로 이동하여 기차에 올랐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중·구대장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고, 32기 전원이 창문을 열고 손을 같이 흔들면서 기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던 우리들만의 당시의 감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휴가 중 해병대 백색 정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학교 동기 및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휴가 기간을 마치고 1963년 6월 13일 기초반에 입교했다.
악몽 같았던 후보생 과정과 차별성이 클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빳다’와 선착순은 약간 완화되었으나 초급장교의 소양 및 자질 향상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24주간의 교육훈련은 빈틈없는 커리큘럼에 의해 일반학·독도법·화기학·전술학 등 철저한 교육이 해병학교와 상남 훈련연대에서 실시되었다.
사관후보생은 1년에 1개 중대를 선발(월남 파병기간 : 2~3개 기수)해서 교육시켰다.
중·구대장은 본인 기수에서 가장 모범장교를 선발해서 발령했다.
기초반 과정에서도 중·구대장은 담금질과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중대장 조형구(해병대사관 18) 대위는 패기와 절도를 보이며 정신훈화를 통해 해병대정신을 불어 넣어 주었다.
중대장은 해병대 사령부 의장대장을 역임했다. 당시 육군 의장대장이었던 이강석(이기붕 아들)과 가까이 지냈다.
이강석 집에 가서 자주 침식을 같이 했는데 이기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이 지속되었다면 승승장구했겠지만 대령으로 예편하여 오래 전에 별세했다.
1구대장 이근호(해병대사관 28) 중위는 고대 출신으로 작은 체구에 독종이었고 차돌과 같았다.
2구대장 강신무(해사 14) 중위는 사관학교 기질로 무척 차갑고 철두철미했다.
3구대장 방기호(해병대사관 29) 중위는 다정다감한 기질로 빈틈이 없었다.
모든 학교 교육에 좋은 스승 밑에 좋은 제자가 배출된다고 했다.
모범적인 중대장·구대장·교관을 통해서 철저히 교육, 훈련을 받았고 단련되었기 때문에 해병대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초급장교로서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고 자부했다.

■ 129명이 각급 부대에 배치되어 부임
해병대사관 32기는 소정의 사관후보생 및 초군반 과정을 철저히 이수했다.
1964년 1월 5일 각급 해병부대에 배치 발령을 받았다.
각종 병과는 보병이 가장 많았고, 포병·기갑·항공·보급·경리 등 충원 소요에 적절히 배치되었다.
부대 규모에 따라 포항 1사단에 가장 많이 배치되었고, 김포여단, 백령부대, 연평부대의 순으로 발령받아 보병 소대장과 병과별 실무장교의 중책을 맡아 빈틈없이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최초 1967년 7월 18일부터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어 32기도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 베트남, 청룡부대에서 사명완수
해병대사관 32기는 베트남 참전 시에 중위로 진급하여 보병은 주로 선임중대장, 포병은 관측장교, 기타 병과는 대대별 참모직을 수행했다.
대위로 파병된 5명은 보병 중대장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할 무렵에는 여단 참모실 등 특수부서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베트남 정글전에서 베트콩과의 전쟁은 너무 참혹했다. 베트남전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간 주월 한국군 전사자 5천 명, 부상자 11만 명, 고통받고 있는 고엽제 환자가 6천6백 명이나 된다.
해병대의 전사·부상·고엽제 환자도 많았다. 사병뿐 아니라 중·소위 장교들의 전사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생사가 엇갈린 베트남전에서 32기는 포병 관측장교 이인건 한 사람이 귀에 파편을 맞아 부상당한 것 외에는 1명의 희생자가 없었던 행운의 기수였다.
1970년 4월 30일 베트남이 적화통일되었다. 파월 장병을 진보세력은 용병이라 매도한다. 또한 친북세력의 지도자들이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 파병이 잘못되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3대 축이 있다. 즉 ① 독일에 파송된 광부와 간호사들, ② 열사의 나라 아랍지역에 파송된 근로자들, ③ 베트남전에 참전한 장병들이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외화를 벌어들여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한강의 기적으로 오늘날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묘비가 무수히 세워져 있다. 현충원의 전사자 묘비를 바라보면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임관 25주년 기념식 모습.

■ 전역하여 각급 요직에서 헌신봉사
해병대사관 32기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장기복무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소령~대위로 전역하여 각급 요직에서 봉사하며 명성을 떨쳤다.
32기는 서울 법대 출신 5명 등 자랑스러운 해병대의 노른자위 기수로 정평이 있다.
동기생들은 각계각층, 각 분야에서 봉사 헌신하며 32기의 명성을 과시했다.
<현역 장기복무자>에 대령은 보병에 황양남, 김흔중(해군 헌병감), 보급감 김경석, 수송감 이의서, 경리감 서성학 등은 각각 병과장의 사명을 다했고, 고급장교에 지해식, 구영현, 박공조, 김재조, 박종빈 등이 현역에 오래 몸담아 헌신했다.
당시 <해병대 장군 정원>이 12명이었고, 비사관학교 출신은 12명 중 1명을 정원으로 못을 박았다.
해병대사관 28기에서 장군 1명이 정원 1명의 자리에 버티고 있어 29기~34기의 6개 기수에서 장군 일 명도 배출되지 못했다.
통상 매년 2명의 장군 선발에 해병대사관 출신은 배제되어 대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몹시 아쉬웠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32기 동기생들은 국가의 안보와 호국의 간성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계> 16대 국회의원 정철기,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장 송석구
<행정공무원> 서초구청장 황철민, 보건복지부 박수길, 문화공보부국장 하진규, 코트라미국주재 관장 강대철
<교육계> 동국대·동덕여대·가천대 3개 대학 총장 송석구, 광운대정보통신대학원장 권혁조, 광주여대·미 아메리칸스테이트칼리지 총장 오경식, 성균관대대학원 원장 석현호, 서울대 교수 어명하, 명지대 교수 최희태, 부산대 교수 이인건, 동아대 교수 백용학, 초빙 교수 박용진·김윤중·김흔중, 학원장 윤한원, 교직 정건영·이정국
<CEO> 삼원기업 회장 김윤중, 신세기통신 사장 권혁조, 포항제철 감사 이형팔, 기업체 사장 김용우·이종성
<금융계> 이학주, 정민양
<항공계> KAL기장 전근재, 신일덕, 권혁준, 이종화, 대한항공 본사 감사 하길홍
<정보계> 중앙정보부 조정관 강윤경
<치안계> 경찰서장 하만정
<문학계> 소설가 정건영, 시인 김흔중
<음악계> 음악지휘자 곽진용
<제약업계> 약제사 소건중, 김중열, 한기일
<종교계> 목사 황규선·김흔중·김문기·김광호·장익근, 스님 지해식
<씨족종친회> 광산김씨대종회 회장 김윤중, 능성구씨 종친회장 구본호
<개인자영업> 윤철모, 유화선, 나도연, 정연규, 이중호, 이광치, 최진길, 노영호, 정병찬, 이희동

해병대사관 32기 동기생들은 끈끈한 전우애를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 한 번 32기는 영원한 32기이다
해병대사관 32기 임관 후 58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평균 나이가 80세를 넘었고, 80대 중반도 몇 명이 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129명이 임관하여 벌써 39명(30%)이 우리 곁을 떠나 별세했다.
이제 노후 대비를 서두를 필요성이 있어 5년 전에 회칙을 개정했다.
부산 지역 동기회(지회장 임금성)가 9명으로 가장 활성화되었고, 해외에 20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수도권을 중심으로 최종 7인이 생존해 있을 때 7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32기 재정을 통해 최후 1인까지 돌보기로 했다.
32기는 초대 회장을 비롯하여 19대 회장에 이르기까지 역대 회장 및 총무가 앞장서 헌신 봉사하여 동기애를 돈독하게 만들었다.
매년 6월 1일 ‘임관기념일행사’ 및 12월 중순에 ‘송년의 밤 행사’를 부부동반하여 보람있게 가졌다.
그리고 봄철과 가을철에 명산대천을 찾아 나들이를 2회 가졌고, 1박의 장거리 관광여행도 했다.
현 19대 김윤중 회장은 6대 회장을 역임했고, 윤철모는 3대 회장을 역임했지만 현 총무를 맡고 있다.
김윤중, 윤철모는 종신 회장, 총무를 맡아줄 것을 동기생들이 권고하여 본인들이 반승락을 했다.
김윤중 회장은 임관 60주년이 되는 2년 후부터 동기생 회비(10만 원)를 전연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 번 32기는 영원한 32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는 세월 잡을 수도 피할 수도 없으니 최후 1인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고종명(考終命)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 역대 동기회장·총무

1대(1969.3.~1970.3.)
회장 권혁조, 총무 김용우
2대(1970.3.~1977.12.)
회장 김용우, 총무 윤철모
3대(1978.1~1979.12.)
회장 윤철모, 총무 유화선
4대(1980.1~1981.12.)
회장 김태규, 총무 유화선
5대(1982.1~1986.12.)
회장 유화선, 총무 서만열
6대(1987.1.~1991.1.)
회장 김윤중, 총무 유병묵
7대(1991.2.~1994.2.)
회장 이종성, 총무 유병묵
8대(1994.3.~1996.2.)
회장 이항수, 총무 박공조
9대(1996.3.~1998.2.)
회장 윤한원, 총무 이희동
10대(1998.3~2000.2.)
회장 정병찬, 총무 유병묵
11대(2000.3.~2004.2)
회장 정연규, 총무 이희동
12대(2004.3.~2006.2.)
회장 이희동, 총무 권혁준
13대(2006.3.~2007.12.)
회장 최희태, 총무 박수길
14대(2008.1.~2009.12.)
회장 강윤경, 총무 윤철모
15대(2010.1.~2011.12.)
회장 박수길, 총무 정민양
16대(2012.1.~2013.12)
회장 구영현, 총무 정건경
17대(2014.1.~2015.12.)
회장 지해식, 총무 유화선
18대(2016.1~2019.2.)
회장 김흔중, 총무 서성학
19대(2019~영구)
회장 김윤중, 총무 윤철모

■ 우리는 신의 가호 아래 있었던 행운의 32기

▲ 김윤중

해병대사관 32기 동기회 회장

삼원기업(주) 회장

세월의 흐름 속에 연륜이 거듭되어 금년 6월 1일에 32기 임관 58주년을 맞이했다.
매년 부부동반하여 6월 1일에 임관 기념행사를 뜻깊게 가졌다. 금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기념행사를 갖지 못해 몹시 아쉬었다.
그러나 2년 후의 60주년 임관 기념행사는 지난 어느 해보다도 성대하게 60년 환갑의 의미를 부여한 기념행사를 가지기로 동기생들의 뜻을 모아 다짐했다.
그간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쏜살같이 날아갔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임관 당시 국내 정세는 4·19혁명과 5·16 혁명으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우리 32기는 이러한 역사적 변혁기에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해병대장교가 되어 민족중흥 및 국가 안보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특히 초급장교로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포화가 작열했던 베트콩과의 정글 속 작전에서 생사가 엇갈렸다.
한국군이 베트남파병 8년 기간에 전사 5천여 명, 부상 11만여 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 32기는 정글 작전 중에 1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없었다. 오직 절대자인 신의 가호가 컸던 행운의 32기였다.
우리는 언제나 자랑스럽고, 늠름했던 해병대 초급장교로 자부심과 긍지는 하늘을 찔렀다.
해병대장교의 자랑스러운 빨간 명찰의 복장을 벗고 떳떳하게 전역한 동기생들은 각계각층의 고위직에서 헌신 봉사하며 혁혁한 공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우리 동기생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32기는 58년전 임관하여 초급장교 시부터 동기애가 무척 끈끈했으나 우리곁을 떠나 별세한 동기생이 벌서 39명(30%)이나 된다. 인생의 무상함을 억제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 발랄한 홍안의 총각(1명, 결혼)으로 해병소위로 임관한 후 요조숙녀(窈窕淑女)들과 결혼하여 내조를 잘 받으며 다복한 가정에서 자녀를 두었고, 벌써 손자손녀들이 장년이 되었다.
우리가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안주할 수는 없다.
이제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했고, 세계화의 추세에 특히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후대에 맡기고, 오직 노령의 말년에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여 해병대 전통을 계승한 선후배 장교들과 함께 많은 32기 동기생들이 100세 시대의 주역으로 오복(五福)을 누리되 마지막 고종명(考終命)으로 향수(享壽)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 권혁조

해병대사관 32기 동기회 초대회장

전 광운대 정보통신대학원장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이 표어는 언제 들어도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들이 인간개조 용광로의 훈련을 거쳐 소위에 임관된 것이 1963년 6월 1일이었으니 만 58년이 지났다.
중국 역사학자 사마천의 ‘人生一世間(인생일세간) 如白駒過隙(여백구과극)’, 인생의 한 세상은 마치 흰 말이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식간이라는 시에 실감을 느낀다.
2년 뒤에는 임관 6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들의 동기회가 당시 129명으로 출발하여 세파에 온갖 고락을 겪으며 현재까지 이르는 동안 39명이 고인이 되었다.
베트남전으로 제대가 늦어졌다. 따라서 취업도 늦어지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32기 동기회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기회 회칙을 만들고 연락 닿은 동기생이 모여 동기회를 발족시켰다.
이때가 1960년대 말이었다. 나는 귀국하여 당시 김성은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 안보보좌관이 될 때까지 부관으로 모시면서 그분의 투철한 안보관과 업무추진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월남전에서 체험한 죽음의 순간을 소개한다. 캄란에서 ‘투이호아’로 부대가 이동한 익일 낮에 월남군과 업무협의 차 1번 국도를 따라 이동 중 베트콩이 매복하여 매설한 크레모아 지뢰에 공격받아 우리가 탄 지프 차가 전복되었다.
다행히 차에 사낭을 깔아 참사를 막을 수 있었으나 뒤에 차량의 운전병은 전사하였다. 그 이후 인생을 새로 산다는 각오로 살아왔다.
해병대 제대 후 전자통신업체 CEO로 근무하던 중 정부의 제2이동통신사업자 사업을 위해 포스코 자회사인 신세기통신(017)을 창업하여 우리나라 디지털방식인 CDMA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 통신 발전에 기여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광운대정보통신대학원장으로 보임되어 학생들에게 교육하였음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현재는 (재)파이터치연구원 이사장으로서 재임하고 있다. 이것이 다 해병대 불굴의 정신으로 키워준 해병학교 훈련 덕분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것처럼 한 번 우정은 영원한 우정으로 우리들 32기 친구들의 돈독한 전우애와 건강을 기원하는 바이다.

 

■ 자랑스러운 해병의 전통 계승

▲ 송석구

現 삼성경제연구소 고문

前 동국대 총장

前 사회통합위원장

한반도 남녘 진해 바다로 태평양을 향해 오대양으로 펼쳐 나가고 육지로는 천자봉을 이어 백두산을 거처 육대주로 질주하는 중심에 해병학교가 있다.
이곳은 소위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가진 해병대 장병을 교육하는 터전이다.
우리 32기는 1963년 3월 12일 해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3개월간의 기초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용맹과 극기의 바다의 용사 육지의 전사로서의 자존과 자긍을 가지고 훈련을 했다.
6·25의 9·28 인천상륙작전의 최전선에서 초개작전을 완수하고 서울 수복과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꽂은 우리의 선배, 도솔산 전투를 통한 희생과 승리의 용사로서의 전승의 정신, 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 때 우리는 맨 앞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켰다. 그 정신이 해병이다.
해병대는 가장 위험한 전쟁에서는 용맹을, 평화 시에는 국민의 안위를 솔선수범하여 지켜왔다. 그래서 언제나 무적해병이라 했다.
우리 32기는 바로 이러한 해병대정신을 이어받아 군에서 사회에서 사회와 국가에 헌신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32기 임관 58주년, 그들의 나이도 팔십 중반을 들면서 동기회 특집을 발간하니 이 또한 해병의 무적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의 백발이 엉성한 머리는 마음에 적이 없음을 나타냈고, 이 특집은 자랑스러운 해병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이 특집을 꾸리는데 애쓴 32기 동기회 회장 김윤중 박사와 회장단, 그리고 편집에 혼신을 다한 김흔중 박사, 윤철모 전 동기회 회장에게 감사의 정을 보낸다.

 

■ 자랑스러운 해병대사관 32기 동기생들

▲ 김흔중

해병대사관 32기 동기회 18대 회장

새시대새사람연합 총재

인간은 최초 인격체로 모태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성숙해진다. 그러나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나는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했고, 해병대를 통해 청년기부터 새롭게 변화를 거듭하게 되었다. 오직 부모님의 은덕이요, 해병대 장교 임관은 축복이었다.
해병대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58년 전이다. 그래서 해병소위 임관 58주년의 의미가 남다르다.
32기 동기생 중에는 나와 비견될 수 없는 출중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자랑스럽다.
동기생 중에서 국회의원, 대학총장, 대학원장, 많은 대학교수, CEO, 종교지도자 등 여러 동기생들이 32기를 빛냈고,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를 과시했다. 자랑은 겸손만 못하다 했지만 32기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
내 개인적인 지난날의 삶을 회고하고 반추(反芻)해 보려 한다.
나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해병학교에서 중·구대장들의 숨막히는 채찍질과 무자비한 연단의 훈련을 통해 땀방울을 많이 흘리며 이를 악물고 끝까지 인내하여 해병대장교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강인한 해병대장교를 양성하여 배출하는 중책을 맡게 되는 중·구대장이 가장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에 비재천학(菲才淺學)하고 함량미달(含量未達)이었지만 중·구대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구대장으로 사관후보생 4개 기수(34~37), 기초반(소위 초군반) 1개 기수, 중대장으로 사관후보생 2개 기수(45·48)를 맡아 해병학교에서 피교육자들과 6년여 동안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같이 땀을 흘렸던 과거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시 같이 땀 흘렸던 후배 장교들이 현역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전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해병학교에서 맺어진 땀방울의 인연으로 전우이자 형제와 같은 우정이 넘치고 있다.
또한 베트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베트콩과의 정글 작전에서 중대장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최소의 희생자(전사 3명, 부상 6명)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래서 주월사령관 부대표창과 전투모범부대기를 받았고, 청룡부대장 부대표창과 전투모범부대기를 받았다.
매년 현충일에 3명의 전사자 묘비 앞에서 묵념하며 명복을 빌고 있다.
나의 현역생활은 해병대 필승의 신념을 바탕으로 1사단 대대장, 2훈련단 연대장, 해병 연평부대장을 거쳐, 해군 헌병감(27대)을 마지막으로 명예롭게 대령으로 전역했다.
현역 생활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뒀다.
전역해서도 해병대정신으로 무장하여 국가 안보와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1년여 동안 체류했었고, 통일 독일을 세 차례 답사하기도 했다.
우리 해병대사관 32기 임관 58주년에 즈음하여 동기생들과 과거를 뒤돌아보며 회고해 보건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해병대 생활과 전역하여 활동한 족적들이 너무나 선명하고 생생하다.

 

■ 내 인생의 큰 획이 되었던 해병대

▲ 서성학

예·해병대령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해병대가 내 인생의 큰 획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졸업 직전 징집영장으로 우연한 기회에 상상 이상의 어려운 훈련도 모른 채 입대하여 힘든 훈련 과정을 구대장님과 교관님들의 배려와 특히 동기생들의 도움 아래 임관할 수 있었음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기초반 수료 후 실무에서는 김포에서 소대장 3개월을 마치고 경리병과로서 후암동 해병대사령부 3년 근무 후 베트남에 파병하여 후라이 다낭에서 1년 근무했는데, 전투병과보다는 안전한 근무를 하였으나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행운으로 넘겼다.
귀국해 다시 사령부에 근무하다가 경리병과로는 해병대 최초로 미국 유학의 영광을 누렸고, 유학으로 인한 복무 연장과 많은 분들의 배려로 대령까지 승진의 영광을 안았다.
1985년 전역 후 동기생인 권혁조 회장의 추천으로 (주)동양정밀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다가 해병대 선배님의 배려로 (주)코레스 사장,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사회생활을 마감했다.
군과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중책이었다고 생각하며 일하는 동안 부끄럼 없이 모범되게 마쳤다고 생각한다.
기간 도움을 준 분들께 항상 감사함을 간직하고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끝으로 해병대 일원의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또한 모든 지인들께서도 가정의 행복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 ‘빠무야(빠다 무찔러 야야)’ 정신으로!

▲ 윤철모

해병대사관 32기 동기회 총무

3대 회장

나는 1973년 1월 25일부터 9개월 동안 2여단 3연대 3대대에서 성병문 대대장님을 모시고 작전장교 임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전역 후 자영업을 하면서 김용우 제2대 동기회장 시 총무를 하고, 1978년 1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2년간 제3대 동기회장을 맡았다.
이후 2008년 1월부터 강윤경 동기회장 시 총무를 하면서 동기회 발전에 기여했으며, 2009년부터는 강북 동기생 모임 회장, 2015년부터는 해주회 회장, 2019년 2월부터 제19대 김윤중 동기회장을 받들어 총무를 하면서 32기 동기회 친목을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빠무야(빠다 무찔러 야야)’ 정신으로 32기 동기회 발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해병대사관 32기 명단
강대철 강윤경 구본호 구영현 권우혁 권혁조 권혁준 김경석 김대현 김영제 김용우 김윤중 김정기 김종률 김진호 김흔중 나도연 노상훈 노영호 박공조 박광식 박수길 박용진 박태윤 배병일 백용학 서배송 서성학 송석구 신일덕 어명하 유상건 윤승현 윤철모 윤한원 이광치 이인건 이재록 이정국 이종성 이중호 이춘겸 이학주 이형팔 이희동 이희복 임금성 전근재 정건영 정민양 정연규 지해식 최진길 최희태 하길홍 하만정 하진규 황규선 황양남 황철민
▲ 해외 거주자
강천호 김광호 김문기 김보언 김일호 김종호 민경서 배성문 손태형 신동수 신준학 오경식 이상남 이상록 이위석 이정헌 이청일 이현택 임영창 장익근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무적해병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