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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최초 출전,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 해병대 최초전투, 군산·장항으로 출동하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25일 아침 10시, 무초 주한 미 대사가 애치슨 미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최초 보고서(워싱턴 현지 시간 24일 밤 9시 26분)에는 “이날 새벽 4시 북한군이 옹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오전 6시 옹진지역, 개성지역, 춘천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고 강릉지역에서는 상륙 작전을 강행했다”고 밝혔다.
북한군은 아침 9시 탱크 10여 대로 개성을 점령하고 춘천에도 탱크를 앞세우고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 왔다.
이렇게 북한군은 포와 탱크와 상륙작전 등 입체적 작전을 펴며 파죽지세로 공격해와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 등지를 경유하여 금강으로 쇄도해 내려왔다.
제주도에서 6·25전쟁을 맞이하게 된 해병대는 명에 의하여 천안에서 대천을 거쳐 군산으로 향하고 있는 북한군 부대의 진격을 지연 또는 저지시키는 한편, 군산에 쌓여있는 대량의 정부미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정부미를 반출해내는 반출작전을 보호 지원하기 위하여 2개의 보병중대와 1개 중화기중대로 편성된 고길훈 부대를 장항‧군산 지구로 출동시켰다.
이것이 곧 6·25전쟁기에 있어서의 해병대의 처녀 출전이었다.
창설된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겪게 된 일이었다 보니 해병대로선 그야말로 성장 전의 나이 어린 소년의 몸으로 미지의 격전장에 출전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조국의 운명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건져내고야 말겠다는 그 피 끓는 애국심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던 해병들은 해병의 긍지와 임전무퇴의 굳건하고 투철한 신념에 넘쳐 있었다.
때는 1950년 7월 중순경, 그러니까 6·25전쟁이 발발한 지 꼭 3주째로 접어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현준 사령관은 출동하는 용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간곡한 훈시를 통해 “첫째, 대한민국의 역사를 창조하는 우리 해병대는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둘째, 선발대인 제 장병들은 해병대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셋째, 백전백승의 굳은 신념으로 싸워라”고 최초의 전투에 참가하는 해병대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줬다.
1950년 7월 13일 오전 8시 30분 제주도를 출항한 해병대는 48시간을 항해하여 15일 8시 군산항에 입항, 즉시 해양대학교 교사에 본부를 설치했다.
출동한 해병대 전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 해병대 최초 처녀작전, 장항전투에 임하다
이때 천안을 점령한 적군은 대대 규모의 일부 병력을 서해안으로 우회시켰는데 그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접전 없이 대천을 경유하여 군산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해병대가 군산에 주둔한 지 이틀 후인 17일 9시경에는 이미 장항 북방 7km 지점까지 침투해 왔던 것이다.
적의 동태를 탐지한 우리 해병대는 적을 추격하기 위해 제3중대(153중대)를 예비대로 하고 제1중대(151중화기중대)와 제2중대(152중대)가 장항 북방 4킬로 지점인 50고지 및 42고지까지 진출하여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적은 거기에 우리 해병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꿈도 못 꾼 채 유유히 등산하듯 오는 것을 맹렬하게 집중사격을 가해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이때의 전과는 원산상륙작전 시 포로로 잡힌 인민군 심문을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약 300명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 해병대의 화력은 어떤가를 살펴본다.
개인 화기는 99식이었고 중화기 2문, 60밀리 박격포 3문의 미미한 정도의 화력으로 신장비로 무장한 훈련된 적을 격퇴시킬 수는 없었다.
거기에 실탄도 부족하고 총구도 굴곡되어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것들이었다.
약 7시간여에 걸친 악전고투를 벌이고 부득이 철수해야만 되었다.
예비대 제3중대가 군산에서 장항에 상륙하여 제1중대의 철수를 지원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군산으로 철수하였다.
대한민국 해병대 첫 전투의 전과는 적 사살 40, 사상 250, 포로 4, 아군 피해는 전사20, 사상10, 행불1 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작전도

■ 군산전투
예상치 못한 많은 피해를 당하며 장항을 점령한 적은 군산에 대해서는 맹렬한 포격을 가하며 진격해 왔다.
적은 이미 야포대대를 포함한 1개 연대 병력으로 증강해 신성리에서 금강을 도하하여 성영리로 진격해왔다.
우리 해병대는 군산에 집결하자 곧이어 적의 진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출동하였다.
제3중대는 이리로 향하고 제1중대, 제2중대는 군산-이리 철로변을 따라 개정리와 지경리 일대를 수색하며 포진하였다.
그러나 금강을 도하한 적은 일부 병력만 이리로 향하고 주력부대는 군산 동북방 10킬로 지점까지 진출하여 군산을 남동북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엇다.
이상의 상황을 판단한 고길훈 부대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각 중대에 내렸다.
“① 부대는 군산을 철수한다. ② 김병호 대위는 이리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제3중대를 지휘하여 이리로 향하라. ③ 제1중대는 고사리고지에 위치하여 부대본부 및 제2중대철수를 지원하라. ④ 김종식 중위는 수색대를 지휘하여 군산을 수색하고 적의 진출을 지연케 하라.”
이렇게 하여 7월 20일 고길훈 부대는 군산비행장에 집결하였고 제1중대는 1개 경기관총 소대를 고사리 부근 고지에 배치하여 부대 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임하게 하고 수색대만 시내에서 적과 교전케하여 적 진출을 저지하며 적 6명 사살 11명 부상, 1명 생포 등 전과를 올렸다. 아군은 2명 전사, 4명 부상의 피해가 있었다.
군산을 포위한 적은 점차 군산시내로 쇄도 해오고 있었기에 수색대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김종식 중위는 본부로부터 하등의 연락이 없어 끝까지 잔류하여 옥쇄할 것을 각오하였으나 주위의 정세가 매우 불리하여 적은 이미 경찰서를 점령하였기에 눈물을 머금고 철수, 본부와 합류하고 21일 목포에 도착했다.
이리로 향한 적은 20일 함열을 점령한 후 이리로 향해 오고 있었다.
제3중대는 이리 북방 1키로 지점에서 교전하여 16명을 사살하고 50명을 부상시켰다.
이때 아군도 15명 전사자와 17명 부상, 7명 행불자를 내었다.
이같이 제3중대는 강력한 적과 조우하면서도 능히 당해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혀줬다.
목포를 향하는 철로를 따라 철수를 개시하여 21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이날 18시 고길훈 부대는 여수로 향했고 새로운 작전에 필요한 현대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신동설 발행인】

※ 자료 출처
해병전투사 (해병대사령부 저)
덕산에서 월남까지(정채호 저)
6·25전쟁과 미국(남시욱 저)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전승기념비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Behind Story

■ 박격포의 산정(山頂) 등장
6·25전쟁 때 처음으로 도입된 75밀리 무반동총(직사포)을 발사함에 있어서 그 요령에 익숙지 못했을 뿐 아니라 총 후미로 분사되는 거의 살인적인 가스의 위력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나머지, 굳이 총 후미 쪽에 버티고 서 있다가 중상을 당한 실례가 있었다.
또한 처음 지급된 박격포를 운용하는데도 포진지의 안전상 마땅히 포를 노출되지 않는 후사면 쪽 후미진 곳에다 갖다 놔야 할 것을 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산꼭대기에다 올려놓고 발사한 예가 허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해병대가 장항 전투 시에도 두 문밖에 없는 포(60밀리 1문, 81밀리 1문)를 산꼭대기에다 올려놓고 발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곡사포인 박격포를 직사포로 착각한 것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했던 것은 역시 포진지 노출에 대한 위험성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다만 관측상의 편의만을 생각한 탓이었겠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전쟁 경험이 없는 데서 빚어진 현상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날의 전투에서는 위치를 노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포진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해 있던 아군 수색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산정에서 발사한 아군 박격포가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사격 지휘 체계에 의한 각종 포의 포술 운용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의 위치에서 이런 일을 상상해 본다면 마치 우스꽝스러운 전설 속의 옛일같이 여겨진다.

■ 부둣가의 군가 소리
장항에서 전투를 치르고 군산항으로 철수한 뒤의 일이었다.
작은 수송선과 어선들을 타고 소대별 또는 분대별로 부둣가에 도착한 해병들은 간단히 인원 점검을 마치는 대로 곧 도보행군으로 병사(해양대)로 향했는데, 그들은 평소 훈련장에서 훈련을 끝마치고 귀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찬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군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하는 구령에 따라 부르기 시작한 군가는 앞서 간 중대나 뒤서 간 중대나 하나같이 ‘나가자 해병대’의 노래였고, 그들이 부른 그 군가 소리는 격전을 치르고 돌아온, 피로에 지친 장병들의 목소리 같지 않게 우렁찼다.
군가란 원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제정하는 것인 만큼 장병들이 병사를 떠나 훈련장으로 떠날 때나 훈련장에서 귀대할 때 힘찬 목소리로 부르면서 오간다는 것이 조금도 신기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군산으로 철수한 해병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전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더구나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미 대세가 불리하여 철수를 해 왔으니 따지고 보면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거나 다름이 없는 처지였는데도 마치 개선 장병들처럼 힘차게 군가를 부르면서 귀대를 했다는 사실은 정말 인상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철수를 해야 할 처지이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적에게 져서 그렇게 된 건 결코 아니었던 거죠.”
그 당시의 일을 회고하는 참전자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하면서 해병들이 불렀던 그 군가 속엔 분명히 그 누구에 의해서도 꺾일 수가 없는 불패의 정신과 필승의 신념이 해병의 긍지와 함께 그대로 담겨져 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 실종자(失踪者)들의 후일담(後日譚)
고길훈 부대가 장한에서 군산으로 철수할 때 진두태 분대장과 신영철 하사는 북한군 정찰대로부터 피격당해 전사자로 보고됐다.
두 사람 중 진두태 상사는 그 후 소식이 묘연하다가 해병대가 경인지구작전을 끝마칠 무렵 원대에 복귀했데, 그동안 그는 군산에 거주하고 있던 같은 일본 해군 출신인 김용보 씨의 도움으로 숨어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가 이미 고인이어서 상세한 후일담을 취재할 수가 없었다.
신영철 하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물소리가 나는 근처 어떤 민가로 운반되어 간신히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출혈과 통증이 너무 심해 치료를 받지 않고서는 생명이 위험했던 그는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국방군 해병대라 게 밝혀지는 바람에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한 병실에 감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도왔던지 그에게는 천사와도 같은 간호사들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 왔다.
그날 밤중에 2~3명의 간호사가 그를 수백 미터가량 떨어진 민가로 운반해 거기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약 20일간 몰래 찾아와서 죽도 끓여주고 치료를 해 주기도 했던 것이다.
보행이 가능해진 후 군산을 빠져나오려다가 북한군에 붙잡혔지만, 전주형무소에서 한 간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미군 부대를 만난 그는 미군 장교(중령)의 수행 통역관(한국인)에게 군산 시내의 적정을 대충 설명한 다음 즉시 쳐들어가서 양민들에 대한 학살을 막아달라고 했던 바, 그런 얘기를 미국인 종군기자가 취재하여 ‘타임’지에 소개함으로써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신 하사는 1·4후퇴 기간 중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 LCI에서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다.
한편, 죽은 줄로만 알고 이미 고별식까지 치렀던 그 신 하사가 밤중에 살아서 돌아오자 신현준 사령관은 촛불을 켜 들고 나와 “네가 귀신이 아니고 진짜 신 하사란 말이냐?”면서 반가워했다.
또한 진해에서 김성은 참모장이 죽었다 살아났으니 장충단 묘지에 가서 다른 영령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라도 드려야 되지 않겠냐면서 가보라기에 무심코 찾아가 봤더니, 묘지의 맨 앞줄에 <고 해군 중사 신영철지묘>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꽂혀 있어 하마터면 기절초풍을 할 뻔 했다.
그 후 해간 7기로 입교, 장교로 임관해 소령이 된 그는 우연히 시내의 다방에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간호사를 만나 극적인 해후의 정을 나눴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 소령의 고등 군사반 동기생들이 피교육자의 처지에 그 여인을 위해 성금을 갹출, 은혜에 보답하는 큼직한 금반지를 선사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신영철 소령이 ‘나가자 해병대’가의 작사가이다. 【신동설 발행인】

※ 자료 출처
덕산에서 월남까지(정채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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