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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은 이기고 돌아오라”

▲ 장성관(해병 190기)

(사)대한국방교육진흥회 회장

현역 시절 장성관 전우

동방에 작은 나라 해동국 조상에 빛난 얼이 서려 있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약관 22세 청년은 조국에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하여 국방의 업무를 이행하기 위해 삼군에 앞장서는 대한민국 신병 190기로 해병대 신병훈련소(경남 진해시 경화동)에 입소했다.
1967년 6월 5일 얼룩무늬 군복에 가슴에는 빨간 명찰과 교번 25번을 부여받은 후 강인한 훈련 받은 후에 대한 해병이 되었다.
그리고 전임에 명받아 1967년 7월 28일 포항시 해병 제1상륙사단 본부에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기습 침투했다.
당시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전사하고 1968년 한국군 창군 이래 처음으로 3월 1일 대간첩 본부가 창설, 초대 본부장에 육군 중장 유근창 장군 대간첩 작전 초대 본부장이 되었다.
또한 당시 대구 만촌동 주둔 2군사령관 육군대장 한신 장군, 대구 성서 육군50사단장 육군준장 류병화 장군이 재임했고, 영일군 청하면 향로봉에는 119전투경찰대가 주둔했다.
해병대는 당시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장 해병소장 정광호, 참모장 대령 허홍, 인사참모 대령 황병호, 작전참모 대령 심재황, 군수참모 대령 김영상, 보병 3연대장 대령 염태복, 부연대장 중령 고임훈, 보병5연대장 대령 강복구, 포병 제11연대장 대령 김종호, 21연대장 대령 김낙천, 공병참모 중령 홍성훈, 탑제참모 소령 이성배, 헌병사령 중령 유동욱, 전차대대장 중령 홍영식, LVT(상륙수륙장강갑차)대대장 소령 문효상, 수송참모 소령 이영진, 헌병대 수사과장 소령 김상붕, 포병 제2대대장 중령 고택구, 보병3연대 2대대장 중령 정순환, 해병 제1상륙사단장 교체 박능도 소장이었다.
출동 5분 기동타격대 및 4시간 대기대대로 영일군 청하면 이가리~월성군 감포면 점촌리까지 해병 제1사단 해안 경계선이었기에 해안을 이용하여 침투하는 간첩 섬멸에 만전을 기했다.
김신조 일당침투 사건에 우리 해병 복무기간이 24개월~36개월로 연장되었다.
1969년 4월 23일 부산 제3부두에서 이역만리 월남 전쟁터에 5진 5차로 파병되어 “청룡은 이기고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송식을 뒤로 하고 대한해역을 거쳐 말로만 듣던 현해탄을 건너 타이페이 앞바다와 카달카섬 공해상을 통과했다.
그때 함선에서 구명조끼를 걸치고 퇴함 훈련을 받을 때 오키나와 주둔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발진한 신형 전투기 2대가 우리가 승선한 수송선을 호위하여 6박7일 만에 월남 다낭항에 도착했다.
당시 기억 중에 수송선에서 미화 3달러 60센트을 경리장교 김영근 대위가 건네줬는데, 그때 달러 돈 냄새가 56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코 안에 배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전우들이 보리밥 신세를 면하고 양식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가련하기만 했다.
우리는 십자군 원정대 국방부 해병 훈련으로 정글의 나라 월남 전쟁터에서 생과 사의 사선에 버려진 국군이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렇게 월남 다낭 항구에 도착한 후 청룡 해병여단에서 각종 작전 및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당시 맹호 포병대 포병지원, 앵커리트 통신 상황, 해포 연락장교들의 비화, 지뢰 제거반 첨병들의 비참한 전사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다음 기회가 된다면 소리 없이 침투하는 베트콩과 땅굴 속에 은신한 브이시 선별작전 등을 무적해병신문 독자에게 소개하겠다. 필승!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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