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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어떻게 준비하고 기습 남침했는가?
6·25전쟁 개전 당시 인민군 기갑부대의 사열 장면

■ 북한의 조직 정비와 전력 증강
북한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공포와 더불어 인민군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고 작전국 등 11개국으로 편성하여 각 군의 업무를 관장했다.
이렇게 군사업무체계를 정비한 북한은 소련 점령군의 장비를 인수하고 중·소의 군사지원을 받아 급속히 군비를 확충해나갔다.
특히 소련은 전쟁물자와 장비지원은 물론 인민군 건설초기부터 군 수뇌부, 각 부대 및 학교기간을 지도했으며, 중대급까지 고문관을 배치하여 전술훈련과 정비 분야에 이르기까지 지원업무를 담당했다.
이리하여 인민군은 소련 군사교리로부터 무장되어 갔고,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에트화가 촉진되어갔다.

■ 북한의 전쟁 준비
북한의 전쟁준비는 1949년 3월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 회담을 계기로 급진전되었다.
이 회담에서 양자가 무력통일에 관한 합의를 보고 경제원조, 군사물자 공급,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 소련이 북한에 1949년 6월부터 1952년 6월까지 3개년에 걸쳐 약 2억 루블(4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북한은 이 차관으로 군사 장비를 도입했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한의 전쟁준비는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김일성은 지상군을 10개 사단으로 증편할 계획을 수립하여 소련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자, 추가 3개 사단을 정비할 각종 장비, 탄약, 기자재 등을 도입하기 위해 1951년도 차관분 1억 3천만 루블을 1년 앞당겨 집행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소련의 동의를 얻었다.
이와 같은 장비로 북한은 모두 전투준비를 갖춘 10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 북한의 기습 남침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남침을 개시했다.
당시 한국군은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대비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원과 장비가 완전히 편성되지 않았으며 방어태세에 있어서도 1개 사단이 평균 60km에 달하는 광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면에 있어서도 병력의 대부분이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이 남침한 당일은 일요일이라 병력의 3분의 1 정도가 외출 중에 있었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하여 후방 지역에 위치한 예비대의 운용에 대한 계획조차도 없었으며, 북한군의 전차에 대한 대비는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 이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다. 【해병대사령부 ‘6·25전쟁 해병대전투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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