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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모두 국제시장 인생인 걸, 뭐…” -越戰 전우의 독백‘드라마틱한 역사’ 서철재(해병 149기) 노병
서철재 노병

■ ‘형’이라 불러 줘!
‘서철재’ 하면 해병대와 고엽제와 월참전우들은 물론 조직사회에서도 그 명성이 알려진 이름이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외무부회장 겸 베트남지부장을 장기간 맡으면서 한-베(Korea/Vietnam) 우호증진에 일익을 담당했다.
합기도 고단자고 왕년에 펄펄 날았던 그였지만 월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질병과 팔순의 나이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노령 세대다.
하지만 왕년에 서울 중심가를 누볐던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과 세상을 직시하는 눈빛은 여전하다.
깍듯하게 선배님으로 호칭하자 “그냥 형이라고 불러!” 부탁하며 그래야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고 했다.

■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 했던가?
인천 전망대에서 27km 직선거리인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서철재 소년은 연백군 해월초등학교 3학년 때 중공군 기습으로 인한 1·4후퇴 당시 아버지(故 서상필)의 손을 잡고 인천으로 피난 내려와 충청도 아산만 근처 선장-유구를 거쳐 마곡사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서철재는 낯선 동네에서 또래한테 얻어맞지 않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동네 아이들을 제압해야 했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루시퍼 효과 이론대로 서철재는 이때부터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존법칙과 실천하는 생을 살게 되었다.

■ 건달에서 ‘해병대 싸나이’ 되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 당시 을3 한국체육관(한체)에 나가면서 충무로와 명동 형들한테 사랑받는 아우가 되었고, 경희대 체대에 입학, 명실공이 한국 건달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추게 됐다.
대3이 되자 군에 가려고 진해 방첩대 형에게 입대를 부탁해 해병 149기 체육특기생이 되었다.
당시 해병대는 체육, 연예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특기생에게 입대 특전을 줄 때였다.
운동으로 다져진 서철재 청년에게는 ‘빡센’ 해병대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훈련소에서 ‘1등 수료’ 명예 보상휴가까지 받았다.
졸병이 명동에 나오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해병대에게 감히 접근을 안했던 그 시대에 어깨가 떡 벌어진 해병대가 명동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두말이 필요 없었다.
급기야 젊은 혈기와 해병대기질이 사고를 치게 만들어 헌병대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회현동 서울헌병대엔 해병대 저승사자로 악명(?) 높은 故 박순재 상사가 있었다.
그는 붙들려왔지만 당당한 모습의 서철재를 직감으로 알아봤다.
“너는 헌병대감이다. 즉시 헌병학교로 가라.” 명하여 영천헌병학교 146기생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체에 다니면서 마산, 부산 건달과 밥 먹듯 싸우고, 고교 4곳을 전학하면서 경희대 체대생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서철재가 ‘진정한 싸나이’로 재탄생했다.

■ “살아서 돌아와라, 그 후는 국가가 책임지겠다” 전광석화 같이 펼쳐진 운명
1965년 9월 18일 서철재는 포항 청룡부대 발대식 요원으로 명받아 포항으로 내려갔다.
이튿날 발대식을 마치자 “호명자 앞으로 나와!” 하며 호명자 100명 중에 끼어 나갔더니 “금일 16시까지 곤뽕 싸서 대기하라” 명령이 전광석화처럼 떨어졌다.
16시 정각이 되자 “산천초목이 떤다”는 해병대 장군들이 술 한 잔씩을 일일이 100명에게 돌렸고, 그들은 모두 취해 잠이 들었다.
이튿날(20일) 06시 눈을 뜨니 김포 비행장이었다.
이봉출 여단장이 오자 애국가, 해병대곤조가, 해병대가 세곡을 부르곤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와라, 그 후는 국가가 책임지겠다” 간단명료하게 여단장 훈시가 끝나자 태극기를 가슴에 꽂아준 후 C-130 수송기에 올라 이튿날(21일) 17시 베트남 나트랑에 내렸다.
이튿날(22일) 평화로운 나트랑을 떠나 캄란으로 이동하면서 실탄 300발씩 지급받자 전장에 온 것이 현실로 꽂혔다.
선두는 헌병 백차, 공중엔 L-19 엄호를 받으며 도착하여 미101 공수사단과 교체되었다.
포항에서 캄란까지 4일간 열차-수송기-차량 수단으로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곳은 미 해병대가 고전했던 지역이다.
적들은 밤 12시가 되면 야음을 이용, 앞에 물소를 몰고 쳐들어 왔다.
아무리 갈겨대도 이튿날 나가보면 사람과 물소의 흔적조차 없기에 귀신부대라 일컫는 베트콩인 것이다.
그곳에서 17일간을 지낸 후 청룡본대가 상륙했는데, 선발대는 5,300명분의 식량 3일치를 경계하는 주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서철재 해병은 베트남 최초 선발대로 들어가 1년 9개월을 지낸 후 1967년 7월 귀국한 베트남전 초창기 전장의 사선을 넘긴 기록 보유자다.

■ 영화 <국제시장> 같은 드라마틱한 삶
제대 후 1975년 8월 신원개발 노무과장으로 이란과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1,300명 중동 건설현장 노무자들의 왕초 노릇을 했다.
1979년 호메이니가 장악하자 팔레비국왕 시절의 건설 사업이 중단되어 1979년 1월 부두공사 노무자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3개월 후인 3월 마지막으로 철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서철재는 국제시장 영화 스토리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자유를 찾아 월남, 건달세계에서 잡초 같은 끈질김, 베트남전 참전, 중동건설 현장을 누비고 살아온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 서철재 노병의 현주소는?
지난 13년간 베트남을 왕래하며 한국 베트남 우호관계와 전쟁 치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고엽제후유증으로 인해 중앙보훈병원에서 죽음의 늪을 오가기를 수없이 반복해 오고 있는 중이다.
고엽제후유증 환자들은 말 못할 고통이 항상 같이 하고 있다.
“내가 걸리고 싶어 걸렸느냐? 국가가 명하여 갔을 뿐이다.” 원망하면서도 “지금도 국가가 부르면 이 한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애국심을 불태우는 이들이 고엽제 전우들이고, 그 시대를 살아온 동년배들이다.
“누더기 같이 살아왔던 지난 80년간 세월이 후세들에게 좋은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하는 그의 안광이 유난히 빛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에게 누가 최고의 훈장을 가슴에 달아줄 수 있을는지… 역사에게 묻는다. 【취재 : 신동설 발행인 / 사진 : 박흥배 보도국장】

서철재 노병은 한-베 친선교류에 앞장섰다.
서철재 노병은 한-베 친선교류에 앞장섰다.
서철재 노병은 한-베 친선교류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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