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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통탄이여! 통일 가로 막은 6·25동란6·25전쟁 70주년 특별기고
6·25전쟁을 합작했던 스탈린(右)과 마오쩌둥.
중공군 개입 초기에 만난 김일성(右)과 펑더화이.

 

▲ 박실본지 고문대한민국헌정회 고문·前 부회장국회 사무총장(제19대)3선 국회의원(제12~14대)(사)대한언론인회이사

 

 

 

■  김일성에 의해 벌어진 남침전쟁
통한의 6·25가 또다시 닥쳐왔다. 민족의 비극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흘러갔다. 가까스로 정전을 이룬지도 60여 년이 훌쩍 흘러갔다. 이미 두세대나 지난 세월이지만 아직까지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고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인지 요원해 보이는 현실이다.
정부는 국무총리 소관으로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 총리를 위시하여 국가보훈처 등 관계부처장들과 민간위원 등 30명을 위촉하여 여러 행사를 기획 활동할 것이라 한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이 민족적 비극을 기념할 것이 무엇인가고 볼멘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픈 역사이지만 6·25를 잊어가는 세대들이 많은 현실에 이를 회고하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지 않도록 반면교사를 삼자는데 본뜻이 있는 것 같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구가하고 있는 오늘의 산업화와 민주적 발전을 가능케 한 수많은 전몰장병들의 희생과 국민 모두에게 감사하고 또 대한민국의 존립과 자유를 위해 힘을 보태준 유엔 등 우방국가들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데 의의를 부여하는 뜻도 있다 할 수 있겠다. 정부는 전쟁의 발발과 진행과정을 재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학술대회 등 활동도 진행시킬 것이라 한다.
6·25동란, 한국전쟁은 적화통일을 기도한 30대 중반의 김일성에 의해 벌어진 남침전쟁이다. 김일성의 요청에 스탈린이 동조하여 중공의 마오쩌둥의 협력을 얻어 감행하고 실패한 3부작이다.
한때 대한민국의 70대가 넘은 노련한 이승만 대통령이 획책한 북침전쟁이거나 유인한 음모설 등 공산권의 악선전, 좌경학자들의 주장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들의 주장이 실증적인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증거가 이미 밝혀졌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친 소련 공산권의 붕괴와 때맞춰 한국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소련 및 중공등과 한국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공산권 자료들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소련의 옐친정부는 김영삼 정부에 100건이 넘는 소련 정부 비장의 조선전쟁에 관한 비밀물건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보기관들은 김일성이 1949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몰로토프 등 소련정부 요빈들을 방문하고 회담한 동영상과, 필름들을 다수 입수하였다. 이런 자료들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연구실적들이 1949년 초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남침 승인을 요청하고 스탈린이 중공의 마오쩌둥과 협의하여 수행하도록 용인한 사실들이 밝혀졌다.
소련과 중공 모두 전쟁 도발 전에 미국과 일본 등 자유 진영의 개입가능성을 문제시 하고 우려했으나 김일성은 남로당 박현영이 장담한대로 북한군의 남침에 남한에 잠복해 있는 30만 명의 남로당 등 친북한 세력이 호응 동조함으로써 단기일내에 남한 점령이 가능하고 미국, 일본의 개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장담했다는 설이 확인되었다.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마오 일행도 김일성의 의욕을 의심하여 주저했으나 스탈린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의 요구에 호응, 남침계획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런 사정은 중공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계속 밝혀지게 되었다.
소련 못지않게 베일에 가려졌던 죽(竹)의 장막 중공의 개혁개방과 한국과 국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조선전쟁 개입과 지원 등 저간의 사정 등이 중공문서 당안이나 학구적 연구, 참전 장병들의 회고록과 증언 등에 의해 상당부분 밝혀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가령 중소관계 전문가 선즈화 교수나 중공당사연구부의 리칭산, 그밖에 양귀숭, 취더쉐, 왕수징 등의 성과물과 저우언라이의 통역 스저및 비서들의 회고록, 중공군 수뇌부의 조선전쟁참관 증언을 통해 그리고 중국공산당 관계의 환구시보나 잡지, 여러 간행물 등을 통해 김일성 정권의 남침설을 뒷받침하는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0년 11월 나팔 불고 징을 두드리며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는 중공군.

■  중공 8로군 편입 10만 조선의용군이 북한의 주력
특히 중공 측 자료는 김일성의 6·25동란 도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중공 8로군 편입 조선의용군들의 활약상을 전하고 있다. 중공은 49년 장제스 국부군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석권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김일성의 줄기찬 요구와 소련의 권유, 자신들 자체의 감군계획 등에 의해 항일전쟁 시 중공군에 편입된 조선의용군 부대 10여만 명을 조선에 보냈다.
이 부대가 48년 2월 창설된 북한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김일성은 빨치산 부대시절 둉료인 김일, 김광협 등을 중국에 보내 유격전 경험이 많은 조선의용군의 인도교섭을 줄곧 벌였는데, 마오 등 중공간부들은 대륙을 평정한 마당에 10만 명이나 되는 외인부대를 계속 남겨둘 필요가 없어졌고 소련의 권유도 있어 이들을 모두 북한에 보내주었다.
이중에는 중공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김무정을 비롯하여 김창덕, 박일우, 박효삼, 방호산, 전우 등 6·25전쟁 초기에 낙동강 전선까지 일사천리, 전광석화처럼 진군해 전과를 올리고 ‘전쟁영웅’ 소리를 들은 노장들이 많이 있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도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6·25 발발 전 중국 사정에 밝은 이범석 국방부장관은 만주에 있던 중공군 소속 조선인 빨치산 부대 7개 사단이 인민군에 편성, 증원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참전 준비하는 중공군.
6·25전쟁 당시 숲에서 튀어 나오는 북한군 전차의 섬뜩한 모습.

 

 

■  김일성 금괴 주고 소련서 무기 구 입도
중공 측 자료에는 김일성이 49년과 50년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면서 황금 9톤, 은괴 40톤, 기타 광석 등 1만5천 톤 등 1억3천 루블 상당의 액수를 지불하고 3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각종 무기와 중장비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했다는 주장도 끼어있다. 그때만 해도 북한 평북의 운산 광업소가 채광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인지하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 북진통일과 태평양 동맹의 구성 등을 소리 내어 추진하고 조병옥, 정일형 등 대미 군사원조 요청 사절을 파견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허장성세를 부렸다.
이때 미국은 원자탄을 소유한 유일한 국가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라 평화무드에 심취해 군대를 줄이고 공산위협을 경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1949년 6월 2만3천 명의 미 주둔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500명 전후의 군사고무단만 남겨둔 상태였다.
한걸음을 더 나아가 애치슨 국무장관은 50년 1월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태평양 지역 방위 전초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 호시탐탐 침공을 노리던 소련 등 공산권을 자극시키기까지 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이승만의 남한 북침설이나 전란유도설 등 이른바 수정주의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한때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한 바 있었던 미국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비롯하여 뉴욕 타임스의 스톤 기자나 케더린 웨더비, 그리고 일본의 좌파학자 와다 하루끼, 히라마스 시게오 등 한국전쟁의 기원이나 비화 등에 관한 저작물을 통해 그럴듯하게 유포되었다.

■ 남북한 모두 망명정부 검토하는 운명에 처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승세를 타고 국군과 유엔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자 50년 10월 말 북한은 수도를 평양에서 강계로 옮기고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도록 지시받았다.
김일성은 하는수 없이 휘하의 최용건을 만주 통화 지역으로 급파하여 중공의 양해 아래 동간변사처라는 기구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오는 인민군 부상병과 패잔병들을 수용관리하고 훈춘 등지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벌이며 당기관들의 소개 준비도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측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해 1951년 1월 서울이 함락되고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자 미관변 측의 요구에 의해 일본으로 정부를 소개시키는 가능성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주일공사였던 김용주 씨가 도쿄에 있는 미군최고사령부(SCAP)의 협조로 요시다 일본정부와 한국인 100만 명을 규슈의 사세보 부근에 유치수용 하는 교섭을 벌인 적이 있었다. 미국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등이 미군 철수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심지어 맥아더 원수까지 자신의 만주 폭격주장이 받아드려지지 않으면 한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설까지 등장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투르먼 대통령의 결단과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한국 이승만 대통령의 항의로 이 망명 소동은 가라앉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미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중공군의 전술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대응, 전선을 안정시키면서 망명설은 가라앉게 되었다. 6·25동란이 가져온 한국민족의 기구한 한 장면들이었다.
김일성이 6·25전쟁을 시작하자 서울 이승만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장면 주미대사가 애치슨 국무장관의 안내를 받아 워싱턴의 백악관을 찾아가 거의 울먹이며 대한 군사원조를 호소하고 트루먼이 결단을 내려 미군을 참전시킨 것과 거의 비슷한 장면이 같은 해 가을 북쪽에서도 진행되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한국군이 유엔군의 상륙으로 효과적인 교두보를 설치하고 미 공군의 집중 공격으로 8로군 출신들로 편성된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거의 몰살되었다. 그리고 38선을 넘어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을 만주와 베이징으로 보내 마오와 저우언라이에게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박헌영은 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지원군이 없으면 인민군은 미군에 의해 거의 괴멸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임을 실토하며 중공군의 지원을 읍소하였다. 6·25동란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서 양진영간의 국제전으로 양상이 변모했던 것이다.
동란 초기 타이완의 장제스 정권은 자신들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여 돕겠다는 뜻을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한국정부에 통보한 적이 있었다. 이조 말 청국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침략을 다투던 역사를 잘 아는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백척간두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중국 군대의 한반도 상륙만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급해진 김일성은 중공군의 파병지원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선대들은 남북관계를 떠나 한국인으로서는 역사적 수모와 비극을 거듭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 전쟁 시작한 김일성, 스탈린에 정전 호소
51년에 들어서서 한국전쟁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된 상태로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자 중공군의 일선 지휘관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폭격과 화력전으로 손실되는 많은 휘하장병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군 등 연합군을 상대로 장기적인 소모전도 힘에 겨워 회의를 품게 되었다. 펑은 이미 양평 지평리에서 매튜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프랑스 등 유엔군에 의해 막대한 병사들의 희생이 따른 첫 패배를 당했고, 이어 화천 지구의 파라호 전투에서 1개 사단(중공군 제 180사단)을 완전히 상실 와해되는 패전을 연이어 당하게 되었다.
그는 중공군 주력 130병단 사령 덩화를 비밀리에 본국에 보내 마오의 심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마오를 찾은 덩화는 조선전쟁에 관한 현지 사정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마오로부터 “일면 대화하며 일면 전투하는 장기전 태세에 관한 대응책”을 설명 들었다.
마오쩌둥이 미국 측과 정전협상을 시작할 뜻이 있음을 처음으로 넌지시 비친 것이다. “대화 하며 싸운다”는 언급에 귀가 번쩍 트인 덩화는 조선전장으로 귀환한 즉시 펑더화이 사령에게 보고하였다.
한국전쟁에서의 정전교섭은 미국 뉴욕의 유엔외교장에서 미국 국무성 고문 조지 케난과 소련 유엔대표 말리크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었지만 정전에 가장 목말라 있었던 사람은 미국 정책당국자들 못지않게 전쟁을 시작한 바로 김일성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15살 연장의 선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거의 폐허가 된 수도 평양을 위시하여 도처에서 매일 기백 명씩 죽거나 다치는 인민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실토하고 있었다.
제공권을 온전히 장악한 미국과 영국, 호주, 그리고 남아연방 등의 유엔공군기들은 오키나와에서 발진하는 B-26·29기 등 중형장거리 폭격기와 동·서해에 포진한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함재기 등을 동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멍석말이 폭격으로 중공군과 인민군, 그리고 북한인민들을 괴롭혔다.
공군을 보내 지상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지원하겠다던 소련은 만주기지에서 출격한 신형 MIG기를 통해 몇 차례 미 공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시도했을 뿐, 제3차 대전으로 확전을 우려하여 더 이상 미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자제, 회피하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미 5공군 등 유엔 공군을 최대한 동원하여 이른바 ‘교살 작전’을 강화하고 있었다. 북한 인민군 정예부대인 8로군 출신의 전투 병력은 낙동강전선에서 거의 소진되어 김일성은 점령지 남한에서나 만주 등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이른바 의용군을 (사실상 강제로) 모집 충원하기에 바빴다.
중공지원군 역시 백주대낮에 작전은커녕 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도 우마차나 인력에 의존해 야간작업으로 겨우 때우는 형편이었다. 특히 중공군의 급식상태는 형편이 없었다. 중국 고전의 병법에 “건초와 우마차가 군대와 병행 또는 선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휘부는 지킬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식용유를 이용하여 음식을 튀겨먹는 초면자육 식습관이 있는데 미군기들의 감시와 폭격으로 연기를 내고 불을 지필 수 없어서 군졸들은 굶다시피 하며 전투하고 있었다. 저우 총리가 앞장서서 개발하고 독려하는 콩, 수수, 쌀 등 곡물에 소금을 가미해 만든 미숫가루나 건빵 같은 휴대식량 등 야전식품들도 제대로 공급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조선전쟁에 참전한 마오쩌둥의 장남 안잉이 평북 산등성의 지휘소에서 음식을 데워 먹다가 새어나간 연기로 미 공군 정찰에 발각되어 네이팜탄 공격을 받아 시체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타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불에 타서 알아보기 어려운 마오안잉의 시체는 그가 차고 있던 소련제 시계 등으로 겨우 식별되어 중국본토로 이송하려 했으나 조선인들이게 보이기 위해 그냥 조선 땅에 묻히도록 하라는 마오의 지시에 의해 평남 회창에 조성된 중공군 능원에 묻혀있다.)
50년 말 미 해병대의 흥남철수작전에는 북한 체제에 싫증을 느끼거나 원자탄 투하설에 놀란 북한주민 10만 가까운 사람들이 남부여대하여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모들도 이들 가운데 들어있었다.)
그밖에도 후퇴하는 유엔군이나 국군 편에 피난민들이 따라 붙어 북한 지역은 이미 심각한 인구감소에 허덕이고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연안 섬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유엔군을 따라 나왔다. 펑더화이의 중공지휘부도 이제 38선까지 진군하여 전쟁발발 이전 상태를 회복하여 현상 유지 쪽으로 기울고 있어 소양강이나 한수 이남 지역으로의 진격을 금하고 있었다.
따라서 승산도 분명치 않은 소모적인 장기전을 더 이상 지탱할 의욕도 사라지고 그저 “엿 빨아 먹듯 하는 유생역량 살상전”만 유지하도록 하고 있었다. 펑도 본국 중앙에 조심스럽게 정전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소련 스탈린에게 정전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12월 4일 미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평양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남하하는 피난민들. 1951년 퓰리처상 수상작.

■ 김일성, 미군 폭격에 북한 인민 감 소 감당치 못해
마오는 51년 6월에 들어서면서 조선전쟁을 정지하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소련의 스탈린에게 문의하고 그의 심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중공군이 매우 지쳐있으며 식량과 탄약의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도보로 움직이고 있는 중국군이 적군기둥부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 보고를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곧 답전을 보냈다.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조선전쟁을 가속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전제하고 “전개될 지구전을 통해 중국 군대가 현대전을 익힐 수 있으며 미국 트루먼 정부를 동요시켜 영·미 군대의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소련이 신형대포와 탱크에 대한 방어무기 등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오는 동북 지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지역 실력자 까오강과 북조선의 김일성을 보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중국 측의 관점을 소련 측에 보고하겠다고 통지했다.
이들을 만난 스탈린은 “당신들은 지금 잘 싸우고 있으며, 계속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쪽은 미국 사람들”이라며 “당신들이 미국 군사를 한 명이라도 더 죽여 미국에 관을 한 개라도 더 보내면 그들이 정전을 고대하게 될 것”이라며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말미에는 중국이 원한다면 일시적 정전에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 표시도 했다. 마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일성과 까오강 그리고 저우언라이 등을 다시 소련에 보내기로 했고 마침내 중국과 북조선 전쟁 관계자들을 동원하여 극비리에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조선전장에서는 미국 등 서방측과 중공 등 공산측이 정전회담 자리를 마련하는 한편 일선에서는 피아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9월 스탈린은 전쟁 당사자들을 다 불러 모아 정전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시도했다.
52년 9월 모스크바의 스탈린 별장의 비밀모임에는 소련 측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 외상, 미코안, 불가닌 등 당 간부들, 그리고 중국 측에서는 저우 총리, 천운, 리푸춘, 수위 등 공산당 수뇌들과 펑더화이 전선 사령관 등이, 조선 측에서는 김일성, 박현영 등이 모두 참석했다.
약 4시간 동안 계속된 이 자리의 모임에서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면서 정전을 달성하자는데 합의했다. 특히 김일성과 가까운 저우언라이가 조선 측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스탈린에게 열심히 설명 설득시켰다 한다.
이 같은 사실은 뒷날 밝혀진 저우의 러시아어 통역 겸 비서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이때 김일성은 근 1백만 명의 주민들이 남한으로 피난 이주했고 평양 등 주요도시와 공장지대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한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석방을 감행했다.
판문점에서 UN 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 사이에 휴전 협정 조인.

 

 

 

■  노련한 이승만의 휴전 반대 전략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목 메워 정전을 갈구하고 있던 시간에 김보다 30여 년이나 더 살아온 70대 중반의 이승만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정(휴)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 최강의 미군들이 한반도에 와서 김일성과 싸우고 있는 판에 기왕에 터진 전쟁을 정전하기보다는 북한공산당을 완전히 괴멸시키고 염원인 북진통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유엔군의 강요로 최덕신 등 한국군을 옵저버로 군사정전회담 참석토록 용인하고 있었지만 그는 남한을 온통 정전 반대의 시위와 농성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53년 6월 정전협정을 가로막고 있던 반공포로의 송환문제를 반대해오던 유엔 측이 양보하고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무쵸 주한 미국대사가 이 박사의 임시거처인 부산 경남도지사 관저를 방문하여 그 사실을 알리자 이 박사는 결연히 반대 임장을 비장하게 피력했다.
이 자리에 입석했던 변영태 외무장관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도 살고 싶소. 그러나 그런 조건 아래서는 우리는 포로교환 등 정전에 동의 할 수 없소.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하기가 어렵소”라고 이 박사는 분명히 거절했다 한다.
클라크 장군은 그때의 모습을 그의 회고록에서 대충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항일 투쟁에서 생긴 상처로 안면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이 노인 대통령은 거의 울음 섞인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승만은 슬며시 반공포로들을 풀어주자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6월 23일 한국군의 경비 아래 수용된 2만5천 명에 달하는 반공인민군 포로들을 전부 석방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포로들은 중국 측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 중공군포로들은 본래 장제스 부대 장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반공포로의 석방에 서방측은 크게 놀라 미국 측은 말할 것 없고, 영국의 처칠 수상까지 이 박사를 매도하고 난리를 쳤으며, 미 국방성은 이 박사를 제거하려는 군사 계획까지 마련하였다.
한국 측은 끝내 정전회담에 참석, 서명하지 않은 가운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공지원군 사령관, 그리고 김일성 등 3인의 서명으로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살상의 6·25 한국전쟁을 휴전시켰다.
30대 중반 김일성의 섣부른 남침적화 통일전쟁은 그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한국인들에게 피맺힌 한을 남기고 전국토를 황패시킨 끝에 총성을 멈추었다. 전쟁 당사국들이 감당해야 했던 물질적인 손실은 말할 것 없고 수많은 인명살상으로 같은 민족끼리의 원한만 깊게 쌓이게 만들어 결국은 통일을 가로막게 되었다.
김일성의 무모한 전쟁을 통해 북한은 1백50만 명 이상의 민간인 피해를 포함하여 남북한 합해 3천만이 못되는 전 인구의 10분지 1이 희생되었다. 전투원들의 피해는 남한의 국군전사 13만8천여 명, 부상 45만여 명, 실종 3만3천여 명 등 60만 명의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 유엔군 쪽으로는 미군 전사 5만5천여 명을 포함하여 5만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포로 5천8백여 명, 실종 1천여 명, 부상 4만여 명 등 5만4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공산군 측으로서는 북한인민군의 사망 및 부상 1백65만여 명, 포로 및 실종 12만 7천 여 명 등 1백78만 명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일본 학자들은 북한 인구의 25.4%인 272만 명의 사망 또는 난민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았다.
인해전술 등으로 알려진 중공군의 손실이 더 커다랗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덩샤오핑은 일본 방문 중 자신들의 손실이 40만 명 정도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객관적인 전사 전문가들은 족히 1백만 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무튼 김일성의 불장난으로 동포 간에는 원한의 골이 깊어지고 특히 인민군의 남한 점령의 인공 치하 3개월과 빨치산 등 유격전으로 엄청난 인구와 재산상의 손실을 남쪽은 견디어 내야했다.
30만 명 가까운 여인네들이 남편을 잃었으며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수만 명이 납북되었다. 전쟁 발발 70여 년이 지나고 이미 두 세대 이상의 간격이 있지만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통일은 여전히 아득한 후일로 미뤄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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