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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창설 71주년 및 6·25전쟁 70주년해병대,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켜왔는가?

‘해병대 뿌리’ 해병대 창설 1·2기생들의 생생한 Story

해병 1기생들은 해군 13기로 가입대하여 통제부에서 대기하다가 해병 1기로 선발되어서 진해 덕산비행장으로 갔다.
1949년 4월 5일 입대식을 하고, 1949년 4월 15일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 창설 구성원이 되었다.
이어서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부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구성된 380명은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 지휘 아래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해병대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진정한 해병대
■ 이봉식(해병 1기 동기회장)

이봉식 해병 1기 회장

- 해병대 입대 동기는?

19살 되던 해 대전에서 우연히 해군 모집이 있다고 해서 그 당시엔 철도 없고 어차피 군에는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입대를 하려고 가입대 지원을 해서 통제부에 갔다.
며칠 지난 후에 1,300명의 가입교생 중에서 300명을 해병대로 모집해 훈련한다고 하여 이왕이면 해군도 좋지만 해병대에 입대를 해야겠다 생각해 해병 1기로 300명의 일원이 됐다.
입대 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훈련을 받고 해병 1기로서 해병대 창설 멤버가 되었다.

- 전장에서 아내를 만난 사연은?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1연대 3대대 10중대 1분대장으로 원산초등학교에 주둔해 있었다.
전령이 물을 길어 와서는 “예쁜 조그만 아가씨가 있습니다”하여 가서 물었다.
고향이 충북 괴산이고 어머니와 남동생이 같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중공군 4개 사단이 밀려오는 바람에 원산항에서 수송선으로 승선하기 직전 그 식구들을 피난민 대열에 합세시켜 배에 태워줬다.
나중에 부산 피난민수용소를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휴전 직전 휴가를 나와서 괴산군청에 찾아가서 물어물어 증평 청안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아가씨(김영자)를 만났다.
그러고 1년 후에 결혼을 해서 4남매(장녀 이성실, 2녀 이인실, 3녀 이현실, 장남 이기홍)를 낳아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 전역 후 후배들 교육에 앞장서고 있는 이유는?

전역을 한 후에 포항에 있으면서 교육훈련단에서 1년에 4~5회, 1사단 사령부에서 3~4회 정도 매년 정훈교육을 약 50분간의 시간을 내 기수별로 강의하고 있다.
우리 해병대는 소수정예이기에 타군에 비해 단결을 해야 되고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힘을 낼 수 있다.
후배들이 훌륭한 군대 칭호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주로 단결과 강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를 하고 있다.

-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우리 해병대가 창설한 지 70년을 넘어가고 있다.
솔직히 후배들을 보며 아쉬운 점은 지금 해병대가 옛날 해병대에 비해서는 나약해지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다소 변화가 올수도 있지만, 내가 교육을 받고 현역에 있을 때보다는 지금 일부 젊은 세대들이 다소 나약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우리 해병대는 초지일관 처음에 먹었던 마음 그대로 정신력을 강하게 다듬기를 바란다.
또 체력이라든지 단결력을 더 강화해 사회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해병대가 되기를 원한다.
지금 현역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한번 되새겨보면서 해병대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는 그런 군대가 되었으면 한다.

 

■ 해병 1기는 진정한 전쟁영웅들
■ 박상용(해병 1기)

박상용(해병 1기)

- 해병대 전투 참전 과정은?

해병 1기로 입대해 훈련을 받고 제주도에서 4·3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길훈 부대에 배속되어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에 참가해 총상을 입었다.
이후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진동리지구전투, 원산상륙작전, 함흥전투, 평안북도·함경북도 경계 금산령까지 진격했다.
진동리전투에서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도 병원에서 한 달간 입원 치료 후에 젊은 혈기로 아픈 줄 모르고 전선을 누볐다.
우리 해병 1기생들이야말로 진정한 전쟁영웅임을 호소한다.

- 전투 중 가장 힘든 기억은?

군산·장항·이리지구 해병대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파편을 여러 군데 맞아 부상을 당해도 병원에 한 번 못 가 보고 전투에 참전했다.
금산령까지 진격했을 때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에 보급로가 차단되어 후퇴하는데 발이 얼어 동상으로 꼼짝 못한 적도 있으며, 눈이 가슴까지 빠지는 길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개풍군 월암리에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소대장(임상용 소위)이 총탄 6발을 맞아 나무 들것을 만들어 뛰었다.
당시 암호명 ‘비원’을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6·25전쟁을 회고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해병대 사랑이 해병대를 강하게 만들었다.
도솔산지구전투에서 승리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믿는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투입했던 것은 탁월한 지도자의 선택이었다.
해병대가 싸웠기 때문에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충무무공훈장(2), 화랑무공훈장(2)을 수훈했지만 진동리지구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지금 걷지 못하고 있다.
당시 병원 기록이 없어서 전상자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5·18희생자들에게는 몇 억씩 주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노병들에게 고작 월 33만 원씩 주고 있는 보훈정책은 매우 잘못됐다.
(박상용 노병의 부인은 “저 양반은 악몽을 계속 꾸며 괴로워하고 있다. 칼을 머리에 두면 악몽이 사라진다고 하여 지금도 칼을 머리에 두고 잠을 청한다”고 말했다.)

 

■ 죽기 전에 꼭 통일이 되기를…
■ 박세양(해병 1기)

박세양(해병 1기)

- 입대와 훈련 과정은?

1949년 4월 15일 경북 김천이 고향인데 강복구(전 해병대전우회 총재, 예·대령) 모병관이 와서 해군을 모집한다고 해서 고향에서 함께 간 13명이 해군 13기로 들어갔다가 대기 중에 해병대(육전대) 1기생으로 지원했다.
가입대로 가서 집에서 입고 온 복장 그대로 이틀에 한 번씩 진해 천자봉을 오르내리는 등 당시에 훈련이 얼마나 심했는지 부모들이 면회를 오면 자식들을 몰라볼 정도로 훈련이 심했었다.
1기생 300명이 2개 중대로 편성됐었는데 1개 중대 전체가 설사병이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워낙 체력이 강해서 모두 이겨냈다.
그때 간부였던 우태영(전 해병대창설동지회장), 김세환 분대장이 완전히 정신 개혁을 하게끔 만들었다.
어찌나 심하게 훈련을 시켰는지 그때야말로 정신개혁을 한 것이다.
하루 규정량의 ‘빳다’를 맞아야 편히 잠잘 수 있었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해병대전우회원들이 단결이 되어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해병대정신이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더우나 추우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이 신뢰하고 믿어주는 해병대전우회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선배로서 얼마나 흐뭇하고 참으로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열심 살아왔는데 아직 통일이 안 되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루빨리 통일이 되는 것이다.
통일이 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전쟁’이라는 글자를 잊고 사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최고의 지휘관은 ‘김성은 장군’
■ 안계수(해병 1기)

안계수(해병 1기)

- 6·25전쟁 당시 전투 참전 경험은?

나는 전투를 안 한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전투에 참전했다.
1949년에 입대해 10월부터 지리산 함양·산청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고, 11월에 제주도로 가서 한라산 4·3사건 후에 공비토벌작전을 하고, 1950년 6월 25일 해병학교 부사관(당시 하후생) 1기로 입교하여 수료 후 3·4·5기 훈련을 제주도에서 1기생들이 시켰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 2분대장을 맡아 12명의 분대원을 지휘하여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
서부전선 장단지구 86고지 전투 시 낮에는 아군, 밤에는 적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포탄을 아군과 적이 쏘았는지 고지가 6m가 내려가서 86고지가 80고지가 되도록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결과적으로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건 천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일본군이 쫓겨나갈 때 버리고 간 구구식 소총으로 싸웠는데, 한 발 쏘고 나면 탄피가 나오지 않아 두드리고 해서 다시 장전하서 쏘는 소총으로 적과 싸웠다.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M-1소총, 카빈소총을 지급받아서 싸웠다.
그 당시 기관총은 받아 본 적도 없고,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나서 제대로 된 무기를 보급 받았다.
M-1소총도 따발총한테는 비할 수 없이 대항이 안 되는 약한 화력이었다.
그러나 해병대정신으로 싸웠기 때문에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해병대 앞에는 적이 없었다. 해병대는 총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해병대 정신으로 싸우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해병대정신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 선배님이 말씀하시는 해병대정신에 가장 주된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 해병대는 앞에 적이 없다는 정신을 가지고 싸웠고, 그렇게 양성을 했다.
나는 “해병대는 그 정신을 기지고 누구에게도지지 말라”고 했던 김성은 장군 생각이 지금도 난다.
서울탈환작전을 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을 시 외출을 내보낼 때 당시 최강부대 켈로부대원들과 싸움이 나도 절대 맞고 오지 말라며 정신무장을 시켰다.
“우리 부대는 소부대이기 때문에 대부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런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고 부대원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주면서, 사고를 치고 와도 그 당시 야외 영창에 안 들어가게 해주었다.

- 해병대 이후 삶은?

해병대에서 일등병조(중사)로 있다가 김일성고지에서 일 계급 특진으로 병조장(상사)이 되어 1956년 2월 29일 제대해서, 사회생활을 한 번도 끊은 적이 없이 활동하면서, 8월 달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순천시가 되기 전 승주군이었을 때 군청에서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해병대전우회(초대 전남연합회장)에 참여해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많아서 교육을 못시킬 것 같아서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무역회사에 입사해 아이들 교육을 시켰다.
아내가 몇 년 전에 작고해 지금은 순천에 혼자 살고 있다.
아들 넷을 낳아 잘 키워서 큰아들(안병후·해병 267)은 서강대, 둘째는 고려대, 셋째는 한양대 공대, 막내는 중앙대를 나와서 잘 되었다.

 

■ 국가를 위해 만든 해병대전우회
■ 이두호(해병 1기)

이두호(해병 1기)

- 해병대전우회 창설 과정은?

나는 1949년부터 1958년까지 만 8년간 근무 후 일등병조(중사)로 전역했다.
1980년 12월부터 해병대전우회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김성은 전 국방장관을 초대 총재로 모시고 1988년 4월 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역대 사령관과 회장단, 회원들이 모인 해병대전우회 창립총회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 만장일치로 초대 사무총장이 됐다.

- 해병대전우회 창설 동기는?

당시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어 없어져서 해병대전우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던 시대였다.
그렇다고 재향군인회 소속으로 해병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병 1기생이기 때문에 전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로 뛰었던 것이다.
해병대전우회를 조직할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각종 사회단체를 모두 정리할 때여서 예비역 단체를 설립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여건을 극복하면서 해병대전우회를 창립하려고 여기저기 뛰다보니 정보당국에 포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안사와 경찰에서 내사를 하고 불려가서 집중 조사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보안사와 경찰서의 방해를 어떻게 돌파했는가?

조직이 완료될 즈음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왜 조직을 하려느냐?” 물어왔다.
그래서 첫째, 사령부가 없어진 것에 한을 갖기 때문이다.
둘째, 예비역 해병대끼리 뭉쳐서 유사시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셋째, 내가 2기생이라면 손대지 않겠지만 1기생이기 때문에 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임한 것이다.
나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정치에 개입하지도 않을 사람인데 방해하지 말라”고 했더니 “고생이 많다”며 감탄하면서 손을 떼었다.

- 오늘날 해병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늘의 젊은 현역들이 일등 청년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해병대로 성장한 것에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예비역 전우들이 얼룩무늬 복장을 입고 교통정리 등 지역사회 봉사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며 국가안보에 이바지하길 바란다.

 

■ ‘단결’과 ‘불패의 정신’으로…
■ 홍우섭(해병 1기)

홍우섭(해병 1기)

- 해병 1기로 입대했을 때 기억은?

해병 1기생들은 해군 13기로 가입대하여 통제부에서 대기하다가 해병 1기로 선발돼 덕산비행장으로 가서 1949년 4월 5일 입대식을 하고, 4월 15일 창설 기념행사를 했다.
왜 4월 5일 해병 1기생들이 입대를 하게 되었냐면 부대 창설을 하려면 병력이 있어야 부대 창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해병 1기생 300명을 먼저 4월 5일 날 입대식을 하고 그것을 근간으로 해서 해병대사령부를 4월 15일 창설하게 된 것이다.
당시 1중대장 정중철, 2중대장 김병호, 그리고 안창관·최낙용 선임 장교가 기억난다.

- 당시 훈련은 어떠했는가?

훈련은 독할 정도가 아니라 반은 죽을 정도로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입대하고 나서 신병 교육을 받는데 5일에 입대해서 15일 창설되기 전까지 무지하게 훈련을 받았다.
훈련 장소가 경화동 비행장로, 우리가 제식훈련 하는 기본 장소가 활주로인데, 활주로는 흙바닥이 아니라 시멘트 포장으로 되어 있었다.
활주로 위에서 훈련을 받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은 다 까지고, 기어다니고 하면서 혹독하게 10일간의 교육을 받았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4월 15일 입소식을 하고 본격적인 훈련으로 들어가는데 그 훈련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훈련이 한참 하고 있을 때 중국이 장개석 총통이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이 진해에 통제부안에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 총통이 진해로 와서 해병 1기생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야, 이런 군대가 있냐”며 놀랐다고 했다.
우리와 같이 덕산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은 2기생들도 덕산 3개월 훈련을 받았다.
6·25전쟁 전에 입대한 것은 해병 1기와 2기생, 두 기수뿐인 것이다.

- 1기생이 가졌던 가장 큰 해병대정신은?

우리가 강조했던 것은 특히 초창기에 소수의 병력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인원은 적지만 단결해야겠다고 하여 첫째가 ‘단결’이고, 둘째가 지면 안 된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싸움해도 지면 안 된다는 ‘불패의 정신’이다.
외출을 해서 싸워서 지고 들어오면 혼이 나도, 이기고 돌아오면 처벌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3개월 교육 기간 중에 훈련을 받으면서 “무쇠는 달궈서 때리면 때릴수록 강해지면서 강철이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 현역 당시 군 생활은?

나는 헌병 출신으로 헌병대에 있다가 법무부서로 넘어가 법률을 공부해서 근무하다 월남전에 참전해 청룡부대 법무감실에서 선임하사로 근무를 했다.
1973년도 9월에 24년간의 군 생활을 미치고 상사로 전역했다.

-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선배들, 특히 우리 1기생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그 전통이라고 할까,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계승해 나가길 바한다.
앞으로 우리 해병대가 발전해나가는데 큰 기여가 되고, 대한민국에서 ‘해병대’하면 우리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강한 군대가 되가 되길 바랄 뿐이다.
회고해 보면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으로 예속했던 역사가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은 해병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견제였다고 위안 삼는다.
지금 해군 출신들을 배척하는 일부 후배들이 있는데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병대와 해군을 편 가르는 것은 안 된다.
적 앞에서는 모두가 협조자고 동지들이다.
특히 해병대는 손원일 제독님의 결단으로 창설된 조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병대와 해군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아야 강한 군대로 존재할 것이다.

 

 ‘해병대 뿌리’ 해병대 창설 1·2기생들의 생생한 Story


해병 1기생들이 수료한 뒤 해군 14기 신병 중에서 2기생들이 특별히 모집돼 훈련을 받았다.
1차 지원자 439명이 제2·3·6중대로 편성되어 훈련을 받던 중 2개월 후 제7중대 병력이 추가로 편성된 것이었다.
1949년 8월 초순에 입대했던 해병 2기 신병들은 약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뒤 비행장 경비요원으로 차출된 일부 병력을 제외하곤 전원이 진주 주둔 부대에 증편돼 있다가 그해 12월 하순경 진해와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병력과 함께 제주도로 이동했다.
따라서 해병대의 발상지인 덕산비행장은 해병 1·2기생들을 끝으로 사실상 해병대와의 인연이 다한 셈이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귀신 잡는 해병대’ 전통을 만들어낸 2기생들 80%가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 우리 해병대가 바로 서야 한다
■ 권영수(해병 2기 동기회장)

권영수(해병 2기 동기회장)

-아직도 생생한 6·25 전쟁 기억
6·25전쟁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분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당시 영덕을 지나서 강원도 녹천리까지 올라가면서 인민군들을 계속 추격 중이던 때가 있었다.
갑자기 인민군들이 사라져 틀림없이 부락에 숨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락을 수색했다.
그런데 한 할아버지가 나와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절하면서 “대장님, 제 아들이 아파서 누워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새파란 20대인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들을 위해서구나 하는 생각에 철수 명령을 하고 나왔다.
아무래도 꺼림칙한 것이 남아있어 나중에 상관에게 사실을 보고했더니 잘했다고 했다.

▲ 팬티 바람으로 울고불고 한 미군
진동리전투에서는 작전 중 수색정찰을 하는데 마산 인근에 주둔했던 미 통신대가 인민군 정찰대에 습격을 받아 12명의 미군들이 칼로 난자당하는 일이 있었다.
인민군은 총을 안 쓰고 대검으로만 기습했던 것이었다.
우리 해병대원들은 칼에 찔려서 죽어있는 12명 정도의 미군을 발견하고,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해서 기관총을 쏘면서 추적했다.
그날은 안개가 자욱해서 사계가 잘 안 보일 때였는데, 인민군 저격수가 도망가면서 우리 동기인 강덕호 사수에게 조준사격을 해 진동리에서 최초로 해병대 전사자가 발생했다.
우리가 점령해서 주위를 수색 정찰을 하다가 미군들이 팬티 바람에 엎드려 있는 것을 봤다.
툭툭 건드리니까 벌떡 일어나서 손들고 살려달라고 해서 우리는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하니까 미군이 우리 다리를 붙들고 울고불고 살았다고 하는 미군을 보기도 했다.
그 당시 미군 생존자들은 천막 안에서 소리 지르고 하니까 자다 말고 도망을 쳐서 나간 사람들은 살고, 도망을 못간 미군은 다 죽었던 것이다.

▲ 우리는 국민을 위한 해병대
이제 앞으로 6·25전쟁과 같은 비극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안보가 바로 서야 하고, 우리 해병대가 바로 서야 한다.
요즘 해병대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다는데 그 이유는 국민들에게 잘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해병대는 5천만의 국민을 살리기 위한 해병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해병대 예비역으로서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군이 잘 되어야 우리 해병대전우들이 빛을 본다는 것이다.
모군에서 실수가 있으면, 해병대 예비역들도 국민들로부터 신용이 추락하는 경향이 있다.
모군이 잘 돼야 한다고 언제나 예비역들은 기원하고 있다.


■ 해병대 역사에 자랑스럽게 남기를…
■ 윤주성(해병 2기 동기회 총무)

윤주성(해병 2기 동기회 총무)

- “나도 출동시켜주쇼!”
우리 해병 2기 동기생들은 모두 439명이다.
현재 살아있는 회원이 34명인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10여 명 정도 된다.
해군 14기로 들어갔다가 해병 2기가 됐는데, 나는 함흥전투를 마치고 진해 교육단에서 독도법 조교로 있었다.
6·25전쟁 때 진해여고 자리에 도솔산전투 부상병들을 후송하는데 너무 넘쳐서 천막을 치고 밖에서 수용했다.
어느 날 유골이 왔는데 동기생 조용한이었다.
너무나 분개해서 “나도 출동시켜주쇼!” 하니까 화염방사기가 곧 들어오는데 그때 교육받고 출동하라고 했다. 그래서 교육받고 출동했었다.
우리 동기생 중 신현우 동기는 태극무공훈장 다음인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우리 해병 2기생이 해병대 역사 속에 영원히 자랑스럽게 남기를 바란다.

 

■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 김성배(해병 2기)

김성배(해병 2기)

-하루에 ‘빳다’ 50대 맞아…
해병 2기로 입대한 뒤 훈련소 생활은 정말 죽을 뻔한 기억만 난다.
그 당시 ‘빳다’를 안 맞으면 잠을 못 잤을 정도로 맞고 나야 잠을 잤다.
최고로 많이 맞았을 때는 단체 기합이라고 해서 하루에 50대를 맞은 적도 있었다.
6·25전쟁 중에는 7중대로 전투에 참가해 대낮에 매복을 하고 있는데 인민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인민군 1개 중대를 전멸시켰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해병 2기생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 죽을 고비를 넘긴 6·25전쟁
■ 신영철(해병 2기)

신영철(해병 2기)

-진동리전투에서 마주친 적
6·25전쟁 당시 진주에서 후퇴해 마산에 오니까 김성은 부대장이 “지금까지 고생 많이 했다”면서 2천 원씩 나눠주며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3명이 합하여 6천 원을 들고 술 한 잔을 막 먹으려고 하는데 헌병들이 마이크를 들고 시내를 다니면서 해병대는 즉시 원대 복귀하라고 방송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시켜놓은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출동해서 우리가 후퇴한 통영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날 진동리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진동리전투에 기관포 사수로 참전했다.
소총은 없고 30mm 기관포만 메고 고지에 올라가 있는데 인민군들의 행렬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나는 그냥 갈겨댔다. 그런데 탄피가 빠지질 않아서 드라이버로 빼내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가 “손들어!”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쳐다보니까 인민군 두 놈이 따발총을 딱 겨누면서 손들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드라이버만 들었는데 손을 들고 가면 포로로 잡힐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죽을 바에는 뛰자’ 하여 돌아설 때 따발총에 맞았다.
그때는 복부에 맞을 걸 모르고 죽지 않으려고 그냥 뛰어 내려오는데 언덕과 낭떠러지에서 구르면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올라갈 때는 20분도 더 걸린 것 같은데 내려올 때는 5분도 안걸 린 것 같았다.
그렇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자유 대한민국
■ 안재두(해병 2기)

안재두(해병 2기)

-잊히지 않는 전우의 죽음
6·25전쟁 당시 김성은 부대가 통영 원문리 고개를 점령하기 전에 지금 통영 신대교 있는 곳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다보면 가파른데 거기서 원문고개를 바라보고 습격을 하면서 올라갔다.
마산·창원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 중 전사한 강덕호 동기하고는 친한 사이로 강덕호 어머니가 마포 시장에서 노점장사를 했는데, 휴가를 나가면 누이동생 준다면서 돈 좀 생기면 뭘 사준다고 쓰지 않고 모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내 옆에서 죽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하고 같은 분대원이었고 30mm기관포 사수로 전투를 하다가 전사했다.
지금 우리 자유 대한민국은 이런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것이다.


■ 해병대는 해병대만의 끈끈함이 있다
■ 정희용(해병 2기)

정희용(해병 2기)

-해병 2기 입대 비화
나는 서울에 살다가 1949년에 해군 14기 모집에 응해 들어갔다.
훈련소 대기 상태 중 해병 소위가 단상에 서더니 “해병대로 오라, 그러면 북한 땅에 제일 먼저 들어 갈 것이다”고 연설하는데 모두 해병대로 쪽으로 갔다.
그랬더니 해군 소위가 올라서서 “해병대로 가면 모두 죽는다”고 하니까 또 해군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해군에 남아 있으라고 붙들었다.
그 현장에서 해병 소위와 해군 소위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본 해군 중령이 단상에 올라가서 해병대와 해군을 분리시키고 정리가 된 다음 그렇게 해병대로 가서는 ‘빳다’를 엄청나게 맞았다.

▲ 자랑스러운 해병대 전통 이어지기를…
나는 항상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전철을 타면 저기서 젊은 사람이 와서 앉으라고 한다.
알고 보니 해병대 후배님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디든 다니면서 해병대가 후배들이 있으면 뭐라도 사준다.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선배가 주는데 안 되는가”하고 말하면 받는다.
우리 해병대는 모두 그런 정신을 갖고 부모들에게 효도하는 효자가 되라는 말을 남겼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 해병대는 해병대만의 끈끈함이 있다.
자랑스러운 해병대 전통을 후배들도 끝까지 이어가기를 바란다.


■ 대한민국 최강부대 해병대
■ 허영철(해병 2기)

허영철(해병 2기)

-더 강해야 하겠구나!
인천에 살다가 해군 14기로 가입대해서 대기하다가 해병대 모집을 한다고 하여 해병 2기로 입대 훈련을 받았다.
김성은 부대장 휘하에 들어갔는데 2개 중대가 그때 당시 최병덕 총참모장이 배치를 시켜 지리산 전투에 투입됐다.
육군은 진주까지 후퇴하고 해병대만 거기 남아 있었는데, 그쪽에서 인민군 포위망을 뚫고 사천까지 나오는데 3일간을 먹지도 못하고 굶으면서 내려왔다.
사병들이 모두 지쳐 있는데 최병덕 총참모장이 김성은 부대장에게 누구 명령으로 후퇴했나며 총살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이 최 총장에게 총을 들이댔더니 그냥 가버렸다.
누구 맘대로 우리 부대장을 총살시킨단 말인가?
그때 그 전장에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상황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 후부터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더 강해야 하겠구나’ 다짐을 받아가면서 정말 대한민국의 국군으로써 최강부대가 되었다.

 

 

박흥배 기자  phb74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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