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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싸운 마지막 사령관옛 부하가 말하는 이병문 사령관
故 이병문 사령관

■ “자네가 지휘관이야, 내가 지휘관이야?”
이병문 장군은 유명한 축구팀을 가진 경신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하신 분이다.
체격이 건장하고, 미남이며, 전형적인 무골기질이 있는 해병간부후보생 1기생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젊은 청년 장군이셨다.
그분이 여단장을 하실 때까지만 모셨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그냥 스쳐가는 만남이 아니었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한두 가지만 간추려보고자 한다.
어느 날 임진강변 김포평야 우리 측에 북의 무장공비가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긴급히 배치된 소탕병력이 여단장의 진두지휘로 일렬로 배치되어 보리수확 직전의 평야를 이 잡듯이 훑어나갔다.
궁지에 몰린 무장공비들은 포위망이 압축되면 수류탄을 투척, 도주하였고 또다시 포위망이 압축되면 투척하고 도주하였다.
숨바꼭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서 우리 쪽 병사들이 희생되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부상당한 해병들이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여단장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가 여단장인 것 마냥 소리치며 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백전노장들은 지휘소에서 상황 전체를 보고 있는데 실전 경험이 없는 나는 부상당해 실려 가는 몇 명의 병사들의 피를 보고 흥분한 것이다.
상황이 끝난 후 이 장군께서 나를 보시고 “어이! 황 부관! 자네가 지휘관이야, 내가 지휘관이야?” 하면서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 독립적인 권한 누리던 해병대
1973년 10월 1일 해병대사령부가 전격 해체되었다. 해병대사령부는 없어지고 해군참모총장 밑에 3성 해병참모부장을 두어 해병대를 지휘하는 해군참모총장을 보좌하게 한 것이다.
원래 국군조직법에는 3군 체제로 ‘해군 안에 해병대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실제로는 인사, 예산 등 중요사항만 해군참모총장의 사전재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별도 해병대사령부에는 해군참모총장이 지휘권을 위임하여 지휘하게 해왔다.
그 후 5.16군사정변과 관련하여 해병대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에 해병대 고위 장성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후 김동하, 김윤근 장군 등이 외형적으로는 소위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위 말하는 알라스카 토벌작전에서 희생됨으로써 토사구팽(兎死狗烹)된 것이고 그로 인해 해병대의 위상이 많이 약화되게 된다.
하지만 군사정권에서는 ‘하면 하는 군대’ 해병대를 무시할 수 없었고 박 대통령과 그 당시 해병대사령관의 친분 등이 작용하여 마침내 4성 해병대 사령관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강기천, 정광호, 이병문 사령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병대사령관의 계급이 4성 장군으로 격상되니 국방부장관이 주제하는 군무회의의 정식멤버가 되었다.
합참이나 국방부에서 직접 해병대를 상대하게 되고, 해군참모총장의 해병대 통제도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그야말로 독립적인 권한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타군, 특히 육군에서 해병대를 너무 키워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 해병대 재편성 동의 거부한 이병문 사령관
이런 상황 하에서 국방부 소속의 대통령특명검열단이란 조직이 있었다. 보통 ‘국방부 특검단’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특검단의 검열과 기습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각 군에서는 비상에 걸린 상태였다.
해병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열을 나오면 괜히 생트집을 잡았고 변명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특검단이 그들 나름대로 활동하고 얻은 결론은 각 군과 해병대를 두는 3군 체제를 없애고 통합군 개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합군 개념이란 야전군, 후방군, 해상군, 항공군, 전략군 등 5개 작전사령부와 군수 교육, 헌병, 의무, 통신, 보안 등 6개 지원사령부를 두자는 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해병대는 없어지고 전략군의 일부로 편성되는 것이다. 특검단은 이런 계획을 들고 다니면서 각 군의 동의를 받으러 다녔다. 육군은 대환영 동의 해공군은 소극적 동의 해병대는 동의를 거부했다.
동의를 거부한 이병문 사령관은 김포여단장(준장)을 할 당시 K모 6군단장(중장)과 함께 한미 제1군단 작전통제를 받는 부대이기 때문에 지휘관회의 시에 준장과 중장으로서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그 사람이 특검단장이 되어 통합군 안을 가지고 이병문 사령관을 찾아갔을 때는 K 특검단장은 그대로 중장이었고, 이병문 사령관은 대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 사람은 검열단장이란 특권의식으로 통합군 계획안을 동의할 것을 강요하였다. 물론 전략군 사령관을 맡으라는 당근도 주면서 회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마지막 사령관! 왜 한이 없겠는가?
이병문 사령관은 해병대의 특수성을 설명하면서 끝내 거부하였고 언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군내부에서 중장이 대장에게 하극상을 했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K 특검단장은 예편하게 된다.
K 특검단장이 예편된 후에 육군 내부에서 해병대에 대한 불만이 이어졌다. “해병대를 너무 키우면 안 된다”하는 소리가 유신정권에서는 솔깃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유신정권을 유지한데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군대이고, 군대 중에는 ‘한다면 하는 해병대’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소인배들의 소리가 정권 안보 차원에서 강구된 것이다.
제2차 해병대 토사구팽으로 해병대 령부 해체가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단행된다. 이렇게 해서 해병대 사령부는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정략적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전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해병대에서는 누구하나 이러한 방침을 알지 못하고 당하고 만다.
그때의 마지막 해병대사령관이 이병문 장군이었다. 내가 여단장 시절 모신 후에 승승장구하여 해병대사령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황제! 마지막 임금! 마지막 사령관! 왜 그들에게 한이 없겠는가? 내용 모르는 사람들은 해병대를 팔아먹었다고 이 사령관을 욕하였고 그로 인해서 많은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분은 해병대를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싸운 마지막 해병대 사령관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청룡직할부대 공병중대 부비트랩교장을 방문한 이병문 사령관(1971)
김포 해병 5여단을 방문한 김종필 당시 총리에게 애기봉 비석을 안내하는 이병문 사령관(1972)
▲ 황철민해병대사관 32기전 서대문구청장전 서초구청장전 서울시 교통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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