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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첫 출전,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1950.7.15.~21.)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 <자료 제공 : 해안(海晏) 정채호>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투전승기념비

제주도에서 6·25전쟁을 맞이하게 된 해병대는 천안에서 대천을 거쳐 군산으로 향하고 있는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 또는 저지시키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군산에 집적되어 있는 대량의 정부미가 적군의 손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반출해내는 정부 당국의 작전을 보호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길훈부대는 2개의 보병중대와 1개 중화기중대로 편성돼 군산·장항·이리지구로 출동했다. 이것이 6·25전쟁기에 있어서 해병대의 첫 출전이었다.


■ 해병대의 첫 전투 임무
1950년 7월 15일 오전 8시경 LST편으로 군산에 도착한 고길훈부대는 해양대학 교사에 본부를 차렸고, 고길훈 부대장은 앞으로의 작전을 위해 즉각 수색대를 장항으로 보내 적정을 탐색하게 했다.
김종식(중위) 수색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장항 쪽 해안에 도착, 그곳에 즐비한 민간인 차량들 중에서 휘발유가 많이 들어 있고 타이어가 튼튼한 차들을 골라 그 위에 기관총을 거치해 시내 쪽으로 들어갔다.
장항에는 피난민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정보를 수집한 결과 적이 아직 서산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됐다.
더 정확한 적정을 살피기 위해 서산 쪽으로 향한 수색대는 가는 도중 일행은 수신호를 하는 20~30명의 군인들과 경찰대를 만났는데, 그들은 인천에서 철수 중인 인천경비부 소속의 해군 장병들과 경찰관들이었다.
이들 일행은 해병대가 군산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사기가 충천해 어쩔 줄 몰랐다.
수색대는 대천 쪽 야산으로 올라가 정세를 살피던 중 적군에게 실탄을 운반해주고 오는 길이란 수 명의 민간인 노무자들을 만나게 돼 더 이상 진출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알고 일단 군산으로 되돌아와 고길훈 부대장에게 정찰 결과를 보고했다.

■ 기습공격으로 큰 전과 거둬…
고 부대장은 비록 불리한 정세 상황이긴 했으나 적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킴과 동시에 그사이 계속되고 있던 당국의 정부미 해상 반출을 용이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색대는 계속적인 정찰 활동을 하게 하고, 10여 척의 민간인 선박들을 이용해 중화기중대(중대장 한예택 중위)와 2중대(중대장 김광식 중위)를 장항 북방 약 4km 지점의 야산 일대로 진출시켜 진격해 오는 적 부대를 기다리게 하는 한편, 예비대로 선정한 제3중대(중대장 이봉출 중위)는 군산 쪽 해안에서 명령을 대기토록 했다.
결국 장항 북방 고지 일대에 진출해 있던 해병대는 이곳에 우리 군이 배치되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적군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을 가한 끝에 약 300명의 적병을 사살 또는 부상시키는 한편 수명을 포로로 잡는 큰 전과를 거뒀다.
불과 20~30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렇듯 큰 전과를 거두었던 고 부대장은 비록 기습적인 요격으로 일단 적의 예봉을 꺾긴 했으나 야포 부대를 동반한 적의 대부대가 파죽지세로 쇄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더군다나 실탄이 결핍된 낡아빠진 99식 소총으론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어 예비중대인 3중대의 엄호와 지원 하에 장항에 상륙한 지 약 7~8시간 만에 부득이 부대를 군산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사력을 다하다
고길훈부대는 전 병력이 겨우 300명 남짓인데다 중화기중대가 보유하고 있던 화기는 고작 기관총 4문(경기 2, 중기 2)과 박격포 2문(81밀리 1, 60밀리 1)에 불과했다.
또 보병중대 대원들의 주 무기는 낡아빠진 99식 소총뿐이었던 상황이라, 고 부대장은 99식 소총으로는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없으니 M1 소총 같은 신무기를 보내 달라고 상부에 긴급 요청을 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했다.
일제 99식 소총은 한 발, 한 발씩 쏘게 돼 있을 뿐 아니라 총을 쏘면 약실에 탄피가 달라붙는 바람에 지릿대를 가지고 쑤셔대야 하는 등 보잘 것 없는 성능의 무기였다.
철수작전에서 엄호를 위해 끝까지 고지에서 분전했던 대원들은 1중대 기관총소대(소대장 강용구 소위)였다.
이때 사수와 부사수는 물밀듯 밀려오는 적을 맞아 계속 불을 뿜고 있다가 부상을 당해 후송되고 말았는데, 이때 소대 전령인 김재곤, 김병천 등 두 일등해병은 사수와 부사수를 대신해 기관총의 윗덮개가 떨어져 나가고 실탄이 약실에 달라붙어 발사 기능이 마비될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최후의 순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기관총을 메고 고지를 뛰어 내려 부두까지 10리 길을 엎어지며 쓰러지며 뛰고 또 뛴 끝에 철수 부대의 마지막 돛단배를 탈 수 있었다.

■ 격전을 치르는 해병대원들
장항에서 군산으로 철수한 고길훈부대는 이틀 후 다시 목포로 향하려 했다.
정부미의 해상 반출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까닭도 있지만, 적군이 군산을 남동쪽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부대장은 우선 육군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3중대를 이리 방면으로 보내 침공해 오는 적을 저지하다가 육로로 목포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하는 한편, 수색대는 군산 시내와 외곽 지대에서 계속 정찰 임무를 수행케 했다가 마지막 철수 제대(梯隊)로서 해상에서 대기 중인 LST에 승선토록 하명하고, 그밖에 제1중대(화기중대)는 부대 본부와 2중대의 승선을 엄호한 후 철수토록 지시했다.
고 부대장의 명령에 따른 3중대는 이리 북방 약 1km 지점에서 강력한 적군 부대와 조우해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을 치른 후 다음 날 철로를 따라 목포에 당도할 수 있었다.
또한 군산 외곽 지역에서 적정 탐색의 임무를 수행한 수색소대 대원들은 시내에서 적군 정찰대의 기습 사격을 받아 진두태 분대장과 신영철 하사가 전사자로 처리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이 비보를 들은 김종식 수색대장은 부하를 잃은 슬픔과 충격에 바닷가에서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을 기도하기까지 했으나, 죽은 줄 알았던 진 분대장과 신 하사는 민간인의 도움을 받아 치료 후 부대로 원대 복귀해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 군산에 울려 퍼진 ‘나가자 해병대’가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는 비록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있었던 처참한 공방전은 아니었지만 6·25전쟁 중 해병대가 최초로 참전한 뜻 깊은 전투였다.
장항에서 전투를 치르고 군산항으로 철수한 뒤 해병대는 평소 훈련장에서 훈련을 끝마치고 귀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찬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군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구령에 따라 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군가는 ‘나가자 해병대’가였고, 그 군가 소리는 격전을 치르고 돌아온, 피로에 지친 장병들의 목소리 같지 않게 우렁찼다.
이날 해병대가 부른 군가는 평소처럼 훈련장에서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 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른 군가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대세가 불리해 철수를 해온 것이었지만 개선 장병들처럼 힘차게 군가를 부르면서 귀대를 했다는 사실은 인상 깊은 일이었다.
이날 해병들이 불렀던 군가 속엔 분명히 그 누구에 의해서도 꺾일 수가 없는 불패의 정신과 필승의 신념이 해병의 긍지와 함께 그대로 담겨져 있던 것이었다.
이 군가가 효시가 되어 훗날 해병대가 서부전선 장단사천강지구에서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했던 날 밤에 휘영청 달 밝은 전초 진지에서 그처럼 씩씩하고 우렁차게 불렀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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