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간항공기 춘천 불시착
1983년 5월 5일은 일요일이었다.
한낮에 갑자기 외교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말하기를 급한 일이 있으니 당장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다년간의 내 경험으로는 일이 매우 급박해 보였으며 그때는 컴퓨터도 나오지 않았고 해서 소식이 유난히 빠르지 않아서 나는 멍멍한 가운데 차를 타고 도착하였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우리나라 민간항공기 한 대가 납치되어 타이완으로 가는 도중 한국의 춘천비행장에 긴급 불시착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의 돌발로 문제는 1백여 명에 달하는 여객의 안전에 관한 일로 당시에는 우리가 한국과 어떠한 내왕도 하지 않는 사이어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 긴박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우리의 면전에서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 중앙에서 외교부에 지시가 하달되기로 즉각 한국 쪽으로 중국민항대표단이 출발하여 서울에 가 한국 측과 회담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한국 측의 동의를 얻은 후 중국 민항대표단이 그날 오후에 수도를 떠나 서울로 비행하였다.
이 일의 처리는 과단성 있고 신속한 행동을 취해 중국외교사상 일찍이 없던 일로 미수교국가와 박력 있게 취한 것으로 외부세계로부터 광범위한 관심을 끌었다.

■ 밤샘 담판하는 한·중 대표단
한국 측은 이 일을 매우 중시하여 외교부차관 공노명(孔魯明)을 단장으로 이날 하오 서울에서 중국대표단과 긴장한 가운데 담판을 벌였다.
중국 측은 이 문제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여객과 항공기를 즉각 중국으로 돌려달라고 명확히 요구하고 납치범 역시 중국 측에서 처분할 수 있게 넘겨줄 것도 아울러 요청했다.
몇 차례의 담판을 위한 화합이 경과한 끝에 한국 측은 중국과의 관계를 배려하여 항공기와 여객은 돌려주겠으나 납치범은 한국 측 법률에 의해 처리하겠다고 버티었으며 철야의 담판을 통해 우리 대표단은 현실을 감안, 일정한 양보를 하여 마침내 양측은 최종처리를 마무리했다.
즉 한국 측은 비행기와 여객을 가능한 한 신속히 중국 측에 돌려보내기 위해 한바탕 고심을 했으며 기내의 여객 대부분이 중국인이어서 사태 발생 후 신속한 조치를 통해 춘천비행장으로부터 서울로 안내, 한강변에 있는 5성(星)급 호텔 ‘희래등(喜來登)’에 유숙시켰다.
그리고 삼엄한 계엄을 펴 안전을 보장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이러한 일은 미수교국가간 돌발한 사고치고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춘천비행장으로부터 서울 김포공항으로 비행기를 운송하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 비행장은 본래 군사용 비행장이어서 민항기가 안전하게 착륙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비행기가 뜨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측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결국 비행기를 김포공항으로 운송해 베이징(北京)으로 회항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 한·중 관계 변화의 발단
1백여 명의 승객은 한국에서 사흘 동안 체류한 다음에 5월 9일 당초 탔던 바로 그 항공기를 이용하여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다만 납치범 주어창런(卓長仁)만은 한국의 처리에 남겨두었으니 이번 돌발사고야말로 비교적 좋은 해결을 본 것이다.
범인 주어는 한국과 타이완(臺灣) 간의 특수 관계로 인해 타이완의 처리에 맡겨진 셈이다.
주어는 그 후 타이완으로 송환되어 그곳에 계속 머물며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다가 종국에는 살인을 한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 항공기 납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며칠 동안 집에 돌아갈 수 없었으며 사무실에서 잤다.
훗날 외교부 부부장이 된 류수칭(劉述卿) 씨가 그때는 아주국장으로 매일 이일에 매달려 밤늦게 서야 귀가하곤 하였다.
이 사건의 신속한 해결은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중·한 관계에 앞으로 닥칠 변화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조선쪽 외교부장이 내방하여 중국 측은 시의적절 하게 그에게 이러한 특수상황 아래서 여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취한 일련의 조치임을 설명했고, 조선 측도 이런 사건이야 말로 1천백만 분의 하나만큼 드문 사건으로 인명에 관한 한 하늘만이 관장하는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북조선측도) 이해를 표시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로서도 분명히 느낀바가 있으며 한국 측도 여러 통로를 통해 우리들에게 두 나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바를 전하여 두 나라 외교방침의 변화를 확실히 했다. <계속>

▲ 박 실 초역 / 전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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